-
코엑스 스타필드-봉은사-선정릉사진과 함께하는 이야기 2017. 6. 30. 15:25
최근에 삼성역에 자주 가게 되는데, 시간이 난 김에 평일 낮의 주변 풍경을 담아보았습니다.
<별마당 도서관 전경>
<별마당 도서관>
<별마당 도서관>
<봉은사 - 연꽃축제중>
<봉은사 연꽃>
<봉은사 연등과 연꽃>
<봉은사 불상>
<봉은사 전경>
폭염을 뚫고 봉은사에서 선릉까지 걸어가보았습니다.
지도상에는 제법 가까워보이지만 그래도 꽤 걸어야 도착할 수 있습니다.
매번 선릉역을 지나치면서 어떻게 생긴 곳일까 궁금하던 차에, 아주 끝장을 볼 각오로 가 보았습니다.
입구가 선정릉역, 선릉역 모두에서 가깝지 않아 당황스러운데 이유가 있었던 점도 재미있습니다.
<선정릉 입구>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이라고 하여 영화관이나 박물관 등에서 할인을 해줍니다.
선정릉의 입장료는 1,000원인데 그마저도 마침 무료라 뙤악볕을 뚫고 도착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입구로 들어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면 '재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왕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잠시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정복을 입은 분께서 무선마이크를 차고 나타나셨습니다.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왕릉 안내를 하는데, 마침 제가 도착한 시간이 1시 55분이었던 것입니다.
5분을 더 기다려 안내가 시작되었는데, 날이 더워서인지 비 예고가 있어서인지 저만 혼자 떨렁 있었습니다.
졸지에 개인 도슨트가 생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 명이라서 질문도 쉽게 받아주시고 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릉 산책로>
<선릉 포도나무>
<선릉 유네스코 기념비>
조선왕조의 왕릉은 총 42기로 그 중 개성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형태가 잘 보존되었고, 유교문화의 형태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짐이 좋고
그 기록과 전통이 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 유네스코 선정 이유라고 합니다.
그 중에도 특히 선릉은 복잡한 도심 속에서 아주 잘 보존된 왕릉의 교과서적인 존재로, 내용을 알고 보면 큰 공부가 됩니다.
<선릉 정자각>
선릉의 입구는 원래 선정릉역 방향으로 나있었는데, 관람객의 사용 편의성을 위해 지하주차장을 건설하던 도중 '금천'의 흔적이 나왔다고 합니다.
금천이라 함은 왕릉 앞을 지나는 개천으로, 이 개천을 경개로 속인과 신계가 나뉜다고 합니다.
지금은 건천이 되고 앞에 도로가 지나게 되어 땅에 묻혀있는 상태인데, 이번 공사중 발견된 것을 계기로 추후 있을지 모르는 복원작업에 대비하여
입구와 지하주차장을 모두 500미터 정도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 주차장에는 비밀이 하나 더 있는데, 나중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금천을 지나 홍살문을 지나면 제사를 지내러 온 왕이 걷는 어도와, 그보다 살짝 단이 높은 향로(혹은 신도)가 있습니다.
향로는 재실에서 준비한 향이 지나가는 자리로, 이 향을 따라 신이 깃들기 때문에
향을 든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심지어 임금도) 향로를 걷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이 지나는 길이라 신도라고도 하는데, 왕릉으로 내려온 조상신이 홍살문 정면의 정자각까지만 내려오기 때문에
향로로는 신이 거닐지 않는다고 하여 신도라 하기 보다는 향로라 부르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으로 유난히 하얀색을 띄는 넙대대한 정육면체 바위가 있습니다.
이는 배위라 하여 임금이 어로를 지나기 전에 잠시 몸가짐을 가다듬는 장소라고 합니다.
절을 했다고도 하는데 장소의 협소함으로 미루어 보아 목례정도에 그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고 하네요.
홍살문 정면의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간이 있는데,
수라간은 재실에서 준비한 음식을 데우거나, 덜어놓는 작업을 하는 곳이고, 수복간은 능을 관리하는 능지기가 사용하던 처소라고 합니다.
(금천 안에 산 사람은 살 수 없으므로, 능지기가 이 수복간에 살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정면의 정자각은 정자가 있어서 정자각은 아니고,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고무래 정'자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丁字閣 이라고 합니다.
앞에 여섯개의 기둥으로 돌출된 구조물이 있는데, 마치 텐트의 타프를 연상케 합니다.
제관들이 드나들기 쉽도록 기둥 사이를 막지 않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방이 노출된 장소라 바람이 있는 모양으로, 정자각 앞과 옆을 덮은 부채꼴 모양의 구조물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이를 풍판이라 하여 바람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정자각 옆면으로 돌계단이 둘 나있는데, 하나는 장식이 화려하고 하나는 투박합니다.
그래서 화려한 쪽을 신이 거니는 신계(신의 계단)이라고 하고 그 옆의 것을 어계(왕의 계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앞서 신도VS향로 논쟁과 마찬가지로 신계가 아니라 향계라 불러야 옳지 않은가 하는 논의가 있다고 합니다.
재미난 점은 어계도 왕만 오르는 곳이기 때문에, 나머지 제관들은 나무계단을 따로 갖다 놓고 올랐다고 합니다.
저도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당시의 방식으로 어계를 올랐는데, 두손을 앞으로 모으고(공수) 발을 한 칸씩 모아(합보) 올라가 보았습니다.
정자각 뒤로는 신만이 지나다니는 길로 어로도 더이상 없습니다.
정자각을 오르는 것은 '동입서출'의 예를 따른다고 합니다.
<선릉>
능 주변으로 살짝 올라가보면 위풍당당한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둥글게 봉분이 샇여있고, 그 주변으로 병풍석을 둘러쳤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으로 난간석을 한번 더 둘러쳤구요.
참고로 병풍석 위로 능을 꿰뚫는듯한 사각 기둥은 인석이라는 것으로 봉분이 밖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뼈대의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봉분 앞의 길쭉한 촛대 모양의 돌은 '망주석'이라 하여 이 곳이 왕릉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고 하고
넓은 상은 '혼유석'이라 하여 혼이 내려와 노니는 곳입니다.
혼유석 아래에는 네 다리가 있는데, 북 모양이라 하여 고석 이라고도 하고 도깨비 문양이 있어 귀문석이라고도 합니다.
조선 초기 왕릉은 3개의 계단 형식으로 왕릉, 문인, 무인의 위치에 차이를 두었습니다.
이때 공간을 구분하는 것이 계단석인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문인과 무인 사이의 돌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왕릉 주변을 두르고 있는 것은 곡면의 담이라 하여 곡장이라 부르고, 풍수지리상 좋은 자리에 위치한 왕릉의 기운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지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왕릉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사실 곰돌이같이 생겼지만)가 있거 각각 악한 것을 물리치고 야생동물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
층 아래로는 문인석과 석마, 무인석과 석마가 도열해 있습니다.
생각보다 거대한 문인/무인석의 크기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선릉 풍경>
선릉은 동원이강릉으로 하나의 정자각이 두 개의 왕릉을 담당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성종과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 정자각을 중심으로 Y자 모양으로 배치되어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 위치상 더 높은곳에 있어 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인데
왕실 배치는 서쪽을 귀하게 여겨 성종의 능이 서쪽에서 남향으로,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 동쪽에서 성종의 능을 향해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정현왕후 윤씨의 능에 있는 석물들의 조각 수준이 훨씬 유려하다고 합니다.
선릉을 지나 구릉을 끼고 크게 바깥으로 돌면 정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종의 능입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탕평책을 펴다가 여러 사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서삼릉에 첫번째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와 함께 있었는데 나중에 두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실제로는 질투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풍수지리가 좋다고 하여 옮겨진 정릉이 잦은 홍수에 물에 잠기곤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문정왕후가 중종의 옆에 묻히길 원했으나 홍수를 이유로 지금의 태릉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앞서 주차장 이야기 중에 하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인데, 현재도 정릉이 물에 잘 잠기는 구조로 되어있어
새로 만들어진 지하주차장 아래로 저수조 설비가 되어 물이 빠지도록 만들어져있다고 합니다.
이상 삼성/선정릉 나들이 포스팅을 마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