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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큐슈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2일차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17. 10. 8. 22:26
<2일차 계획표>
전날 저녁에 간식을 푸짐하게 먹은 터라 조식을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틀차의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호텔 1층으로 내려오니 무언가 맛있는 내음이 가득했다. 많이는 안먹더라도 맛 정도는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이끌리듯 식당으로 향했다. 꽤 이른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수트에 넥타이까지 매고 아침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멀리서 이 곳에 출장온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비지니스 호텔이라는 말이 다시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그 속에 반바지에 새파란 린넨 셔츠를 입고 있는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둘러멘 사람이 나타났으니 시선이 집중될 법도 했다.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런 것에 신경쓴다면 혼자여행은 하기 어렵다. 아무튼 접시를 하나 들고 메뉴를 찬찬히 훑어보자니 종류는 많지 않은데 구색이 꽤 괜찮았다. 오니기리(주먹밥) 4종세트에 고등어구이, 계란말이도 있고 된장국과 채소절임까지 있었다. 일본식 아침식사 한상차림이었다. 맛만 볼 생각으로 소담스럽게 퍼담아 맛을 보았는데, 나갈때 크게 후회가 되었다. 그냥 왕창 먹을걸 하고 말이다.
이날의 목적지는 쿠로카와(黑川) 온천이었다. 큐슈의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화산인 '아소산' 근처에 있는 온천인데, 일본 온천 앙케이트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전통미와 현대미를 잘 조화시킨 곳이라고 했다. 차를 렌트했다면 쉽게 가볼 수 있는 지역이지만, 대중교통이라고는 버스를 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버스는 구마모토와 벳부(別府) 사이를 연결하는 규슈횡단버스인데 구마모토와 연결되는 것은 가는 것과 오는 것 각각 세대 뿐이다. 아침에 일찍 가더라도 온천을 즐기다 온다면 저녁때쯤이 되어서야 구마모토로 돌아올 수 있다. 하루를 통으로 온천과 교통에 쓰게 되는 것인데, 이럴때는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내 자신에게 서운하기 그지없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좋다는 온천을 가보지 않는 것은 남큐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루를 과감하게 투자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쿠로카와는 관광지의 느낌이 강해서 음식을 못먹고 구경다니는 상황도 상정해 두었기 때문에 교통센터 건너편의 편의점에서 미리 빵과 우유를 구입해 놓았다. 도시락은 데워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심적인 준비를 해두는 편인데, 갑자기 빵을 데워줄까 하고 물어봐오는 통에 순간 당황을 하고 말았다. '다이죠부데스(괜찮습니다.') 라고 말을 해야 할 것을 '다...다메...(아...안돼...)'라고 말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다시 정정하긴 했지만 참 민망한 순간이다. 외국인인줄 알아보았을테니 잘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다.
<아소 구마모토 공항 근처에서 본 에어서울 비행기>
<쿠로카와 온천으로 가는 길에 본 멋진 곳>
<아소-구마모토 공항>
<불이 난 것이 아니라 곳곳에 온천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논의 정경>
<작년에 갔던 오이타, 이번에 가는 아소>
<원래 저런 형태인가, 지진으로 무너진 것인가>
<곤포 사일리지>
<벽처럼 솟아있는 산의 위용>
8시 16분에 탑승한 버스는 10시 44분이나 되어서야 온천에 도착했다. 두 시간 반 동안 바깥 풍경을 쳐다보고 있는데 질리지 않았다는 점이 참 좋았다. 특히 아소산 정상 부근에 올라섰을 때에 펼쳐지는 낮은 잡목림의 모습은 참으로 신기했다. 그런 식생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얼핏얼핏 보이는 기괴한 풍경들이 이곳을 특별하게 느껴지게 했다. 다만 곳곳에 도로공사를 하거나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들이 보였는데, 아마도 작년의 지진때문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이라고 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일상에 집착(?!)하는, 루틴한 삶을 지향하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들에게 뜬금없이 찾아오는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 또한 일상으로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일상을 깨는 특별한 일로 느끼는 것인지 말이다. 이런 것은 일주일의 여행으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 더욱 궁금한지도 모르겠다.
<구로카와 온천 입구>
쿠로카와 온천 정류장에 내려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디가 온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왠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으로 그저 쫄래쫄래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개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하나 지나고 나니 온천으로 보이는 건물과 민가로 보이는 건물들이 뒤섞여 있는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안내판에 쓰인 '인포메이션'에 가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15분 정도를 구불구불 걸어갔을 때 커다란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장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말이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내가 찾는 인포메이션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다를까 2순위로 찾고 있던 화장실과 1순위로 찾고 있던 안내소(인포메이션)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여행이 계획대로 되면 신명이 나는 법이다. 안내소에 들어가니 에어컨바람까지 나오고 있었다. 신은 내게 남큐슈라는 시련을 주시고 그 시련을 이겨낼 에어컨도 함께 주신 모양이다. 잠시 내부를 구경하며 숨을 돌리고 있자니 비로소 쿠로카와 온천에서 내가 하려던 일들이 생각났다.
<쿠로카와 온천 우편국>
쿠로카와 온천이 유명해 진 것은 최근의 노력 덕분이고,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온천마을'이라는 이미지를 심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본래 온천은 단체 관광객을 맞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커다란 연회장 등을 갖추고, 그 주변에 환락가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쿠로카와는 이와 반대로 옛 개인 온천이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소박함과 자연 정취를 즐기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얼핏 들어보면 유후인의 활성화와 비슷한 케이스가 되는데, 유후인이 좀 더 세련된 이미지를 포함하는 개발 제한 정책을 썼다고 하면 쿠로카와는 과거로 회귀하는 정책을 썼다고 보면 얼추 맞을 것도 같다. 이에 더해서 '온천패스권(入湯手形-뉴토테가타)'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하여 개별 온천 입장료가 500엔 인 것을 3개 입장이 가능하도록 하여 1300엔에 판매한 것이 시너지효과를 보였다. 한 곳에 머물다 갈 사람들이 여러 곳을 둘러보며 이용하게 되고, 이것이 마을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온천 패스권은 통나무를 얇게 잘라서 쿠로카와 온천을 즐기는 쿠마몬을 인두로 새겨놓았기 때문에 기념품의 의미도 톡톡히 해준다. 참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든다.
<온천 패스권과 지도>
안내소에서 패스권을 구입하면서 한숨 돌리고 나니 비로소 옆에서 색색거리며 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흰 얼굴에 검은 머리카락을 5:5 가르마로 탄 듯한 녀석은 이따금씩 귀를 팔랑거리면서도 눈은 뜨지 않았다. 흰 눈썹과 수염이 숨과 함께 팔랑거리는 모습이 사뭇 귀여웠다. 카운터에 '고양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많이 찍어 가시란다. 행여 찰칵거리는 소리가 그의 숙면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연신 셔터 누르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지정석에 놓인 방석 위에서 조용히 잠을 자던 녀석의 모습이 꽤나 부럽게 느껴졌다.
<숙면 냥선생>
큰 각오를 다진 뒤에야 안내소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우선은 마을을 좀 돌아보기로 했다. 크게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며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그 다음에 개중 괜찮아보였던 온천을 찍어 목욕을 해볼 요량이었다. 우선 예전에 TV방송에서 보았던 '동굴 온천'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이름만으로는 어디에 그 온천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무작정 돌아보자는 마음이었다.
<구로카와 정경>
더운 날씨에 평일이라 그랬을까, 관광객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따금씩 숙박을 겸한 온천을 온 사람들이 봉고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 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 한참 걸어서 마을의 끝자락쯤 내려갔을 때는 정말 무인온천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논밭에는 벼와 각종 채소가 푸릇푸릇하게 익어가고 있는데, 돌보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무서워져 내려가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빼곡한 여관 안내판>
<쿠로카와 온천마을 정경>
<마을 불상>
<알맹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거대 달팽이>
개천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고 있자니 매미소리가 한가득이다. 생각해보니 8월 한여름에 일본을 여행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느끼는 매미소리가 대단히 생소했다. 문득 며칠 전에 보았던 한 게시물이 생각났다. '이게 무슨 곤충인가요?'라며 녹음한 소리를 들려주었는데, '쓰르라미 울 적에'라는 게임에서 들었던 쓰름매미(실제로는 저녁매미라고 한다.)의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게임의 분위기가 스산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 울음소리가 참 무섭게 느껴졌다. 8월이 그 매미의 시즌인 모양이었는데, 다행히 홀로 걷는 쿠로카와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른 곳에서 듣게된다.)
<쿠로카와 개천>
한참을 걷다보니 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마을도 얼추 구경했겠다, 한 곳을 잡고 목욕을 해보기로 했다. 마을 아래서 올라가는 길목에 아예 입구가 다리로 되어있는 온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생각나는 그런 다리라서 자연스럽게 그 곳에서 첫 번째 목욕을 하게 되었다. 일본의 온천은 대부분 수건을 유료로 렌탈하게 되어있는데, 두 번쯤 렌탈을 할 요량이면 새 타올을 살 수도 있어서 나는 그냥 이곳에서 한 장을 사기로 했다. 몸의 수분을 털어내는 정도로만 쓸 수 있는 자그마한 수건을 하나 사들고 안내받은 방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신메이칸 다리>
<신메이칸 입구>
보통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되는 것이 일반적인 온천이라 한다면, 이 곳은 여탕과 혼탕으로 나뉘어 있었다. Mixed bath라는 문구에서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고,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함부로 탕을 들어갔다가 치한으로 몰려 일본 경찰과 대면식을 갖기 보다는,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아쉽게도 첫 번째 손님은 여자 두 분이라서 나의 판단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니 아들과 함께 온 듯한 부자가 들어왔다. 일본사람들이었는데 그들도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패닉에 빠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음 일단 내가 일본어가 부족해서 이렇게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닌듯 하다. 그러는 와중에 세 번째로 온 남자가 자연스럽게 혼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확신이 섰다. 왜 이름을 혼탕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곳의 혼탕은 남성전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 온천은 내가 찾고 있던 동굴온천이었다.
신메이칸(新明館) 료칸은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여관인데, 손님이 없던 어느날 주인장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관심이 생겨야 손님도 올 것이다.' 그래서 손에 끌 하나를 들고 여관 옆구리의 바위를 파들어가기 시작했다. 3년에 걸쳐 30미터의 동굴을 목욕탕 모양으로 파내는데 성공하면서 이목을 끄는데 성공했다고. 좁은 공간에 동굴 두개를 파기는 어려웠던지 결국 이 동굴은 남녀 혼탕(!!)이 되어버렸고, 실질적으로는 남성이 사용하는 모양새가 되었던 모양이다. 입구즈음에서 옷을 벗어 바구니에 넣고 탕 안으로 들어가니 뜨끈한 기운에 안경이 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바깥 날씨가 더워서 찬물에 몸을 담구었으면 더 좋았을테지만, 나름 피로에 찌들은 다리를 뜨뜻하게 지지는 기분도 괜찮았다. 다만 워낙에 폐쇄된 공간이라 습기가 높아서 오래 있을만한 곳은 못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따로 수도시설이 없어서, 목욕을 마치고 나면 새로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할 수 없다는 점도 치명적이었다. 그냥 신기한 느낌으로 한번 경험삼아 들어갈 만한 곳이었다.
<흘러내린 토사를 정비중>
희한하게도 목욕을 하고 나서 더욱 목욕을 하고 싶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깨끗하고 시원한 물로 헹궈내고 싶은 마음이랄까. 들어간지 20분이 채 되지 않아 밖으로 나온 나는 이번에는 마을 위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냥 공사중일 수도 있는데, 왠지 작년의 구마모토 대지진의 피해라는 생각이 들게 곳곳에 무너진 토사를 정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길이 막힌 곳도 있어 이리저리 돌아가다 보니 마을의 꼭대기쯤 위치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뭔가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의 료칸이 나타났는데,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이런 곳에서 묵게 되었으면 싶을 정도로 좋았다.
<오쿠노유>
<오쿠노유 온천 입구>
<오쿠노유 앞 무인 온천 계란 판매대>
오쿠노유(奥の湯)는 내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온천이었는데, 처음에 입구로 들어갔을 때 규모에 위압을 당할 정도였다. 비시즌이라 그런지 입구에 들어가고도 사람 하나 찾을 수 없어 약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심지어 카운터에도 사람이 없어서 괜히 어슬렁거리며 기다렸는데, 혹시 온천패스권이 통하지 않는 곳은 아닌가 싶어 괜히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안내소에서 받은 지도에 숫자로 표기된 곳은 모두 온천 순례가 가능한 곳인데도 말이다.) 얼마간 헛기침을 하니 바로 사람이 나와 수속을 밟아주었다. (수속이래봤자 이용 안내와 패스권의 스티커를 수거하는 정도지만.) 넓은 로비를 한참이나 가로지를 뒤에 연회장으로 보이는 곳까지 또 한참을 걸어가니 비로소 욕장의 입구가 보였다. 바깥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탕에 들어가니 설비가 깔끔하고 우리나라 목욕탕과 다를바가 없어서 안심이 되었다. 탕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깔끔한 대욕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샤워기에서 찬물을 틀어 머리부터 적셔주니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타이밍이 절묘했는지 그 넓은 욕장을 사용하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었다. 탕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찬물로 식혀주기를 반복하다가 문득 바깥쪽으로 향하는 문이 있음을 깨달았다. 뭐하는 곳인가 싶어 조심스레(알몸이니까) 문을 열어 고개만 빼꼼 내밀어 보니 노천온천이 있었다. 역시나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당당하게 야외로 가 보았다.
사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알몸으로 산 속을 걸어다닌다고 하는 것은 아주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왠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되고,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대단히 민망해질 것 같은 그런 기분. 다행히도 노천에서 물장난을 치면서도 여전히 나는 혼자였다. 노천온천 옆으로는 더 작은 탕이 하나 더 있었는데, 쿠로카와 개천이 철철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다큐멘터리같은 곳에서 보던 일본 온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사실 그런 노천온천에 대해 약간의 로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번에 온천을 해 보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노천온천에는 벌레 시체가 많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누가 그랬다던가. 매번 화면에 보이는 일본 온천의 모습은 멀리서 잡은 모습 뿐이고, 물 가까이에서 그 실태(?!)를 찍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노천 온천이 어디 사람만 따끈하게 몸을 지지는 곳이던가. 어디서 새가 날아와서 물을 마시다 갈 수도 있고, 벌레도 왔다 갈 수 있고, 그러다가 빠질 수도 있고, 탈출하지 못해 그대로 익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벌레를 아주아주 무서워하는 전형적인 도시남자라는 것이었다. 벌레를 보고 무서워진 마음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 온천을 느긋하게 즐길 수 없었다. 내 발에 닿는 까칠한 그것이 벌레인지 낙엽인지 모를때의 그 충격이란.
덕분에 풍경 좋은 노천온천은 아주 잠시만 머무를 수 있었고, 나는 다시 현대식 대욕장으로 돌아와 찬물로 몸을 식혀야 했다. 탈의실로 돌아오니 선풍기가 보여서 머리를 슬슬 말렸다. '이 정도 바람과 그늘이라면 남큐슈 여행도 별 문제 없겠군'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게 아주 잘 휴식을 취하고 여관을 나섰다. 사실 오쿠노유에서 워낙에 몸이 풀어져 버려서 패스권의 세 번째는 사용을 하지 말까 생각도 했다. 돌아갈 버스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서 목욕을 할 시간은 충분했는데, 목욕의 만족도가 워낙에 좋았던 탓이다. 근데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다. 음료를 마시러 안내소 근처의 관광코스를 슬쩍 돌고 있자니 다시 몸에서 땀이 스멀스멀 배어나오며 목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마지막 온천을 어디에서 할까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에 옆으로 스쳐지나가듯 눈에 띈 간판이 내 발을 사로잡았다.
노시유(のし湯)는 쿠로카와 온천 중앙에 있다. 안내소와도 가깝고 도로에서도 가까운 편이라 접근성이 대단히 좋았다. 피로한 나를 이끌어 '여기서 노시유'라고 말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지막 패스권을 이곳에서 사용하기로 했다. 일단 입구부터 대단히 옛스러운 느낌이 나는데, 들어가서는 더했다. 전체적으로 '숲속의 오두막집'같은 느낌이 들었고, 여관에 정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원에 여관을 조그맣게 심어둔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어리버리하고 있자니 기모노를 입은 지배인(정도의 포스가 느껴지는 젊은)분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셨다. 지나가는 길에도 일본 전통방식의 화덕(囲炉裏-이로리)이 있는 공간을 스쳐가는데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샤워시설이 따로 없는데 괜찮겠느냐'며 물어보셨는데, 여기까지 들어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연신 '괜찮습니다.'를 외쳐댔다. 역시나 탕에는 나 혼자밖에 없어서 거리낄 것 없이 탈의를 하고 욕장으로 향하는 미닫이 문을 열어제꼈다.
<노시유 간판>
<노시유 온천 입구>
오쿠노유가 강 옆의 온천이었다면 노시유는 숲속의 작은 온천이었다. 비스듬히 내려가는 길목에는 나무로 된 두꺼운 난간이 있어 자칫 미끄러울 수 있는 걸음을 보조해 주었다. 탕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씻어낼 수 있도록 절구통같이 커다란 돌덩이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를 온천수가 대나무통을 타고 통에 물을 거듭 채우고 있었다. 꽤나 뜨거운 물이라 아주 조심조심 몸을 헹궈내고 욕탕에 발을 담구었다. 발목까지 넣었다가 대번에 빼냈다. 생각보다 너무 뜨거웠던 것이다. 바로 옆에 온천수가 들어오는 곳이 있어서 그런지 입구 부근의 온도가 상당했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입구를 한번에 건너뛰기로 했다. 예상대로 원천에서 멀어지니 조금 온도가 식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많이 뜨거웠다. 엉덩이만 슬쩍 걸치고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에 둘러쌓여있는 것 치고는 벌레나 낙엽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뜰채로 관리를 좀 해주면 그래도 좀 괜찮아지는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앞서 하도 충격을 먹어서 이제는 덤덤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오지 않는 틈에 살짝 찍어본 온천 풍경>
역시나 더운 날씨에 뜨거운 물에 오래 담구지는 못하고 다시 나오게 되었는데, 문득 몸을 식힐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탈의실에 손을 씼는 세면대가 있는데, 거기서 찬 물을 받아다가 헹구면 되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이른 것이다. 탈의실에 여전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절구통 옆의 나무바가지를 들고 조심조심 들어가 물을 트니 찬물이 콸콸콸 쏟아졌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바가지 한가득 시원한 물을 담아와 다시 절구통 옆으로 돌아와서 정수리부터 조금씩 부어 제끼니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개인적으로 목욕의 마무리는 찬물이라는 주의라 역시나 노시유에서의 목욕도 만족스럽게 끝날 수 있었다. 나오는 순간까지도 아까 안내해주신 분이 '탕은 괜찮으셨냐'며 인사를 해 오셨다. 목욕의 마무리로는 이 이상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시유 온천 앞 멧돌>
<노시유 입구>쿠로카와 온천에서의 장장 다섯시간 반에 걸친 목욕으로 여독(이랄게 쌓여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을 해체해버린 나는 조금 이른 시각에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구마모토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버스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온천 미아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준비한 것이다. 후쿠오카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사람들을 잔뜩 태우고 떠나버리니 정류장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 20분쯤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애타게 바라던 에어컨 빵빵한 버스가 도착했다. 그때 헐레벌떡 한 일본 여자분이 뛰어와서는 운전기사님께 뭐라뭐라 부탁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친구가 지금 오고 있는 중이니 버스를 잠깐 기다렸다 가주실 수 없냐는 것 같았다. 나는 일본의 특성상 칼같이 제시간에 출발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사분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5분여를 더 기다려주셨다. 막차를 놓치면 당황스러울 사정이 뻔히 보여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튼 덕분에 일본인에 대한 하나의 편견이 벗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버스 빨리 안간다고 기사를 몰아붙이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아저씨 덕분에도 일본인이 감정표현을 자제한다는 편견도 깨졌다. 어디든 사람사는 곳은 다 똑같은 법인가보다.
구마모토와 쿠로카와를 오가는 버스는 중간에 '阿蘇駅-아소역'에 정차했다. 올때도 지나왔지만, 갈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인 것이, 버스 창가로 보이는 풍경이 달라서 그렇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여행을 하다 보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내가 앉은 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는 길에 좌측으로 앉으면 오는 길에도 좌측에 앉아야 양쪽 모습을 다 보게 되는 것이다. 온천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넓게 펼쳐진 논밭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보게 되었다면, 구마모토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날카롭게 깎인 아소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침 아소역에서 10분 정도 정차를 한 덕분에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가 16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산을 맨눈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안그래도 날카로운 모습이 위압적인데, 가끔 터지기까지 한다니 정말 무시무시하면서도 장엄했다. 터진 모습을 보고 싶으면서도 터지지 않았으면 하는 양가적 심경도 함께했다.
<깎아지르는 아소산>
첫날과 달리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구마모토 시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낮에는 날씨가 뜨거워서 그랬는지 거리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되려 밤이 되니 사람이 많아진 느낌이다. 가게도 문을 닫은건지 열은건지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어 비로소 영업중이었구나 싶었다. 남국의 낮과 밤이 다 이렇게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구마모토는 밤이 활기찬 도시로 한동안 기억될 것 같다.
<불을 환하게 밝힌 구마모토 사진관>
숙소는 구마모토 교통센터에 있지만 이날은 구마모토역까지 가기로 했다. 4일차부터 사용할 남큐슈 레일패스에서 예약할 수 있는 노선들을 미리 예약할 요량이었다. 이틀을 있어보니 굳이 예약을 하지 않아도 잘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는데, 그래도 혹시나 특정 노선이 매진되어버리면 여행 계획이 크게 꼬일 요량이 있기에 미리 해두기로 한 것이다. 인기가 많아서 탑승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노선까지 총 6개의 코스를 한 번에 예약하고 나니 비로소 여행이 궤도에 올랐다는 느낌이 왔다. 4일차에 타카치호를 거쳐 노베오카로 가는 길만 문제가 없다면 여행은 계획대로 탄탄대로일 것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역에서 나와 구마모토에서의 첫 노면전차 탑승을 해 보았다. 교통센터와 구마모토역이 구글지도상에서는 꽤 가까워보였는데, 버스를 타도 그렇고, 노면전차를 타도 꽤 먼 거리였다. 처음에 숙소를 정할 때 아무 생각 없이 구마모토역 옆의 저렴한 호텔을 잡으려고 했었는데, 그러지 않기를 천만 다행이었다. 여행이 잘 될 때는 이렇게 사소한것도 맞아 떨어지는 법이다.
<구마모토역 쿠마몬>
퇴근과 하교가 겹치는 시간이었는지 직장인들과 학생이 노면전차에 가득했다. 덕분에 에어컨에도 불구하고 다시 땀범벅이 된 상태로 숙소에 들어갔다. 목욕을 세번씩 해도 소용없는 더위에 찐득하게 들러붙은 옷을 간신히 벗어제꼈다.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벌러덩 눕고 나서야 오늘 하루의 일정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욕조에 물을 살짝 받아 반신욕을 하고 있자니 '이렇게 탱자탱자 쉬면서 다녀도 되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그렇게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나.'싶은 생각도 들었다. 항상 여행을 가면 있어온 일이다. 나가서는 하나라도 더 보겠노라며 이를 악물고 걸어다니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이게 무슨 짓인가.'하는 짓 말이다. 근데 여행은 다니는 동안에 즐거움도 있지만, 진짜배기는 후에 추억보정이 되어 그 시간을 회상할 때다. 내 경우 그 행복감은 경험의 양의 비례해서, 푹 쉬고 온 날은 '쉬어서 편했지.' 라는 단 한줄의 감상평으로 끝나는 반면, 이런저런 일을 잔뜩 해치우고 온 날은 하루 종일 떠들어도 시간이 부족한 행복한 추억으로 남는 듯 하다.
<근사한 편의점 저녁식사와 호로요이 한 캔>
<후식으로 달달 고소한 푸딩>
이날도 조승우형님과 비밀의 숲을 탐색하며 편의점에서 사들고 들어간 도시락과 호로요이 한 캔을 해치웠다. 여행이 많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숙소를 내 집처럼 여기게 되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다. 겨우 이틀차에 이렇게 포근한 내집이라니.(심지어 여기는 청소도 해준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푹신한 침대에 누워 내일의 여행을 다시 점검하다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꿈에서도 계속 비밀의 숲 주제가가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은 드라마의 한 장면과 함께 기억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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