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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1)
    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23. 1. 16. 23:04

     

     

    첫날 일정 계획

     

     

    2020년 열려라 참깨를 외쳤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2021년 다시 열려라 참깨를 외쳤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2022년 열려라 참깨를 외쳤다. 문이 열릴 턱이 없었다. 그래서 주문을 바꿔보았다. "엔드코로나!!" 드디어 문이 열렸다. 일본관광이 재개되었다. 

    2019년 말에 우연한 기회로 모 출판사의 리뷰대회에 입상하여 오사카 항공권을 받았다. 매년 한두 번은 드나들었던 일본이었지만 그때 나는 자격시험을 준비 중이라 다녀오지 않은 상태였다.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시험일자가 많이 남기도 하고 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덥석 여행계획을 세웠다. 남이 사주는 표라서 가격 생각하지 않고 난생처음으로 기내식을 주는 비행기를 타고 교토와 고베에 다녀왔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즐거운 여행을 추억의 책갈피에 추가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년에 합격하고 나면 일본에 다시 놀러 와야지' 합격도 오지 않았고 출국길도 닫혔다. 이게 3년이 넘게 갈 줄이야?

    2022년 9월이 되니 일본 입국이 슬슬 가능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처음에는 가이드가 있는 패키지여행만 허용되었다. 그러다가 조금 완화되어 숙소만 정해져 있는 자유여행스런 패키지까지 허용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비자 입국이 재개되었다. 슬그머니 표를 알아보니 이미 표가 없는 날이 많았고, 표가 있더라도 가격이 폭등 중이었다. 3년씩 생이별한 한일커플들도 있다고 하니 그분들 먼저 만나는 게 맞지 싶긴 했다. '나 같은 여행객은 조금 기다렸다 가도 괜찮으리라.'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계속되어도 표값이 안정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 코로나가 안정되었다는 보장이 없어서 항공사들이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수요가 폭주하는 가운데 공급 증가는 미미했던 것이다. 보통 가격이 비싸면 여행생각을 하지 않았을 나지만 마음이 조금 급해졌던 것은 왼쪽 옆나라(가운뎃나라) 사정 때문이었다. 코로나로 현재 국경을 봉쇄 중인 그 나라의 여행제한이 해제되는 순간 고즈넉한 여행과는 안녕을 고해야 하리라. 

    이따금씩 스카이스캐너 사이트에 들어가 항공편을 알아보곤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어갈 찰나 슬슬 티켓값이 사정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8년 전 뭣도 모르고 방문했던 도쿄를 다시 방문하는 AS여행을 해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이전의 푯값 기준으로 가격이 너무 높은 상태였다. 오사카와 후쿠오카는 꽤나 샅샅이 훑고 다녔으므로 아직은 재방문이 당기지 않는 여행지였다. 도야마나 에히메 같은 소도시를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아직 항공사의 수요예측이 되지 않는지 취항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홋카이도 티켓이 눈에 들어왔다. 왕복 28만 원. 평소에 다니던 곳들과 비교해 보면 분명 비싼 금액이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홋카이도행 티켓보다는 저렴한 가격이었다. 보통 40만 원 이상씩 하던 곳이었는데 무슨 일인가 생각해 보니 비수기였다는 점이 작용한 것 같았다.

    한 여름 더위를 피해 선선함을 느끼며 색색의 꽃밭을 구경할 수 있는 7~8월의 홋카이도여행. 그리고 한 겨울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 설원의 홋카이도여행. 사람들이 홋카이도에 대해 생각하는 대표적인 계절들이다. 그리고 자리가 있는 티켓은 10월 말.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늦은, 겨울이 오기엔 많이 이른 애매한 시기였다. 인간이, 아니 내가 참 간사한 게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홋카이도인데도 저렴한 티켓이 며칠째 없어지질 않으니까 '이 시기의 여행은 그렇게 별로인가?' 싶어서 욕심이 사그라들었다. 더 간사한 것은 그렇게 표를 지켜보다가 자리가 없어지고 가격이 올라가니까 미리 사두지 못한 표가 너무나 아쉽고 속상해졌다. 간 보다가 망했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며칠 뒤의 표가 같은 금액대로 나오는 것으로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제를 완료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꼬에요.

    사실 티켓팅을 할 때 3박 4일 일정과 5박 6일 일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시즈오카에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시즈오카 티켓팅을 하면서 3일짜리 일정과 5일짜리 일정을 두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당시엔 그런 생각이 있었다. '5일 뒤 귀국하는 항공권을 샀는데 3일만에 구경이 끝나면 어떻게하지?' 라는 생각. '남은 이틀동안 뭘 해야 하지?'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그때 3박4일로 티케팅을 했고 여행 마지막날인 4일차에 공항으로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속으로 눈물을 펑펑 흘렸던 기억이 난다. 3일 아니라 30일도 모자란다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티케팅을 하면서 여행기간을 먼저 정하고 그 뒤에 보고 싶은 곳을 찾아가며 일정을 만든 뒤 숙소를 예약하는 루틴이 있다. 항공권을 구입하는 시점에는 정보가 별로 없어서 '뭐 볼게 그렇게 많겠어?' 라고 생각을 하지만 계획을 세우다 보면 점점 보고싶은 곳은 많아지고 주어진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분단위 계획을 세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이 때가 바보같은 나를 꾸짖을 절호의 찬스다. "이봐 나새끼! 여행은 무조건 긴 게 최고야!" 그런 과거에 대한 후회를 바탕으로 10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5박 6일 일정의 홋카이도 여행계획이 시작되었다.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에겐 교통에 대한 선택지가 많지 않다. 바로 BMW다.  Bus, Metro, Walking의 약자다. 이번 여행에선 JR패스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홋카이도에서 사용할 수 있는 JR패스는 '삿포로-노보리베쓰 에리어 패스', '삿포로-후라노 에리어 패스', '홋카이도 레일패스'로 3종이다. 본인의 여행지역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데, 하코다테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무조건 '홋카이도 레일패스' 외에는 답이 없다. 하코다테와 삿포로를 왕복하는 JR열차의 티켓이 19,000엔 정도인데 그것을 포함하는 홋카이도 레일패스 5일권이 19,000엔이기 때문이다. 비행기표를 싸게 샀다고 좋아했더니 교통비에 함정이 있었다. 가난한 뚜벅이 여행자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레일패스를 결제했다. (그래도 한국에서 할인받아 미리 구매했더니 16만 5천 원 정도의 금액으로 선방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블로그와 유튜브를 섭렵하며 가보고 싶은 여행지를 고른 뒤 구글지도를 펼쳐놓고 동선을 최적화하는 작업을 했다. 이것은 참으로 피 말리고도 재미난 여행준비였다. 그렇다. 나는 ENTJ다. 들숨 날숨까지 계획하고 싶다.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도 정보 탐색과 수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알아본 교통편으로는 공항에 제시간이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속 알아보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던 것이다. 부랴부랴 계획을 수정해서 인천에 있는 본가에서 하루 자고 새벽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집에 하루 묵고 가겠다고 연락을 드리고 나서도 교통계획에 의심이 가시지 않아 다시 검색해 보니 그 방법으로도 공항에 너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여행 시작부터 이런 방식의 두근거림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알아보니 강남역에서 새벽 4시께에 출발하는 공항버스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 강남에는 나의 고환친구가 넓은 집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개똥이 약에 쓰려니 있었다(!!) 무릎 꿇고 전화를 걸어 저자세로 밤에 비바람만 좀 피하게 해달라고 하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다시 본가에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해서 강남에서 출발하기로 했다고 하니 아버지가 여행에 보태라고 엔화를 환전해 놨는데 어쩌냐고 하셨다. 주말에 하루 시간을 빼내어 집에 들렀다. 여행경비 넉넉하게 준비했는데 뭘 이런 걸 또 준비하셨냐고 하니 '밥 굶을까 봐 걱정돼서'라며 웃으시는 아버지. 어머니는 비행기표는 본인이 해주시겠다며 한사코 사양하는 내 통장에 송금을 해주셨다. 나이 먹고 부모님을 모시고 어디 다니지는 못할망정 혼자 여행 간다고 용돈까지 받고 다니는 못난 아들은 참으로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돈은 안 주셔도 되니 그저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면서 내가 언제든 돌아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든든한 항구로 계셔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친구네 도착해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수다에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결국 잠은 못 자고 버스시간이 다 되어 집을 나섰다. 약간은 쌀쌀해진 10월 말의 새벽. 공항버스에는 여행의 설렘이 가득했다. '계절에 아직은 좀 일러 보이는 털이 북실한 코트를 입은 저분은 나처럼 공기가 찹찹한 홋카이도에 가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 잠들었다간 내릴 곳을 지나쳐버릴 정도로 피곤한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부릅뜬 채로 버티며 공항에 도착했다. 3년 만의 인천공항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공항에 오랜만에 오기도 했고, 코로나 이후에 출입국과 관련해 바뀐 상황들이 많아서 조금 걱정을 했다. 배낭에 들어가지 않아 가방 아래쪽  끈으로 고정해 둔 덜렁거리는 삼각대를 수하물 규정으로 문제 삼지나 않을까, 백신접종증명서를 준비해 뒀는데 뭔가 맞지 않다고 비행기표를 취소시키지나 않을까 등등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카운터에 도착했다. 다행히 기존의 체크인에서 접종증명서를 추가로 제출해야 하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보안에서 짐검사까지 마치고 공항 로비에 들어서니 비로소 약간 안심이 되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려보내진 않겠지 싶었다. 시간은 오전 6시. 7시 25분 비행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인천공항에서 난생처음 아침밥도 챙겨 먹어보았다. 육개장으로 배를 두둑하게 채운 뒤 미리 알아본 냅존이라는 곳에서 눈을 잠시 붙일까 생각도 해봤는데 잠들면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자지 않고 버티다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의 가속력에 몸이 뒤로 쑤욱 밀려나고 어느새 두둥실 떠올랐다. 인천공항이 점처럼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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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 내부 모습과 냅존

     

     

     

    육개장

     

     

     

     

     

    삿포로행 비행기 탑승준비중
    내가 탈 제주항공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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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한국과 일본

     

     

    비행기는 서울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롯데월드타워의 우뚝 선 모습이 한강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섬 하나 없는 동해바다가 나오더니 한참 지나 육지가 나왔다. 일본 혼슈였다. 비행기는 육지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더니 다시 또 바다가 나오고 곧이어 커다란 섬이 나왔다. 그곳이 홋카이도였다. 유튜브를 어찌나 열심히 봤었던지 하코다테와 노보리베쓰 상공을 지나갈 때는 그곳이 어딘지 대번에 알아차릴 정도였다. 결국 비행기에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창문에 껌처럼 들러붙어 연신 셔터를 눌러대었다.

    홋카이도공항에 내리니 넓은 통로에 사람들이 죽 늘어서있었다. 여행객이 아니라 공항 쪽 사람들이었는데 MySOS를 통해 방역 관련 사전정보를 입력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여 안내하고 있었다. 마라톤을 뛸 때 관중들 사이를 뛰어가는 기분이 이럴까?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보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오하요고자이마스." "곤니치와"라며 환영해 주었는데 왠지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사실 관광이 생업인 분들에게 코로나란 얼마나 재앙 같은 일이며, 그 종식을 알리는 무비자 관광객이란 얼마나 반가운 존재일까. 나는 그 간절한 마음이 나중에 귀찮음으로 변하지 않기를 속으로 조용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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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치토세공항 내부 모습

     

     

    신치토세공항에는 커다란 쇼핑몰이 함께 있는데, 아무래도 자국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인 만큼 국내선이 쇼핑몰에 가깝고 국제선은 멀다. 국제선에 내린 나는 무빙워크를 한참을 지나서야 비로소 쇼핑몰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꽤나 지치는 느낌이었다. 쇼핑몰 구경은 돌아가는 날 하기로 하고 곧바로 JR 창구로 향했다. 미리 준비한 홋카이도패스 바우처를 준비하고 여권과 함께 제시했다. 3년 만의 일본행에 입이 얼어붙어 일본어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전에 조금 공부를 해놔서 일본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띄엄띄엄 잘 써먹은 일본어였는데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힌 3년 사이에 혀가 일본어와 완전히 어색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본어가 안 나오니 급한 마음에 영어가 섞이기 시작했고, 나중엔 역무원은 영어로 말하고 나는 일본어로 대답하고 있었다. 여행이 끝나갈 때쯤에서야 일본어가 다시 입에 붙기 시작했지만 이미 많은 흑역사를 남기고 만 뒤였다. 

    사실 JR 홋카이도패스의 경우 첫날은 신치토세공항에서 삿포로역에 가는 용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시하면서 아깝긴 했지만 어차피 5일짜리 티켓이라 5박 6일의 일정에서 첫날이던 마지막날이던 그렇게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첫날 아예 홋카이도 동쪽으로 달려서 말로만 듣던 오호츠크해를 찍어보고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JR 홋카이도패스는 지정석 지정 횟수에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삿포로까지 지정석을 바로 받아두었다. 사실 열차이용계획이 시간표까지 모두 세워져 있어서 이날 지정석을 모두 발권해 둘까 생각도 했는데, 날씨상황 등을 고려해서 일정이 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각각 당일에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덕분에 아침마다 꽤나 바빴다.) 예전에 규슈 같은 경우에는 패스권을 역무원에게 보여주면서 통과하는 방식이었는데 홋카이도패스는 직접 개찰구에 집어넣어야 하는 방식이라서 혹시나 나가면서 뽑지 않고 두고 가버리는 불상사가 생길 확률이 있었다. 재발급도 되지 않는 고가의 패스권이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북해도는 추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차창을 투과하는 직사광선을 맨얼굴로 듬뿍 받아내야 했고 등이 흥건하게 젖어들고 나서야 삿포로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치토세에서 삿포로로 가는 열차는 북쪽으로 달리기 때문에 오른쪽 창가자리에 앉으면 오전에는 피부가 따꼼하다.)

     

     

    JR 홋카이도 레일패스의 사용법과 주의사항이 적힌 한글 안내서를 보여주셨다.
    해가 쨍쨍 내리쬐던 열차 창가석의 추억
    거대한 삿포로역의 위용

     

     

    입국 시 방역과 관련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넉넉하게 삿포로역에 3시쯤 도착할 것이라 생각하고 계획을 짜두었는데, 정작 역에 도착한 시각은 12시를 갓 넘긴 상황이었다. 원래 계획표상으론 3시에 숙소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고 짐을 내려놓은 뒤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에 모이와야마 전망대에서 야경을 감상하는 것이 목표였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틀차 오전 일정으로 잡아두었던 시로이코이비토파크 관람 일정을 미리 땡겨오기로 했다. 이틀차 오전의 비어버린 시간은 숙소에 가서 다시 계획하기로 하고 곧바로 JR라인을 타고 핫사무역으로 향했다. (자꾸 인터넷 밈인 "일해라 핫산"이 생각나는 역 이름이었다.) 사실 삿포로역에서 시로이코이비토파크까지는 JR이 아니라 사철인 도자이선을 타고 미야노사와 역으로 가는 것이 훨씬 가까운데 굳이 JR패스를 이용해서 가보겠노라며 JR을 탄 것이다. 290엔을 아껴보자고 한 짓인데 발바닥이 아작 나고 있었다. 카메라와 삼각대 등이 들어가 있는 관계로 가방 무게만 이미 10kg가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걸 숙소에 좀 덜어두지도 못한 채로 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 시로이코이비토 파크. 나중에 구글지도로 계산해 보니 1.7km를 쌩으로 걷고 있었다. 그러다 시로이코이비토 초콜릿팩토리 간판을 보았을 때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물론 돌아갈 때는 도자이선을 타고 갔다.) 핑크빛 알록달록한 벽돌로 장식된 유럽스타일의 건물과 높은 시계탑까지, 유튜브에서 보던 바로 그곳이었다. 

     

     

    시로이코이비토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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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이코이비토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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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이코이비토파크

     

     

    이전에 8번의 일본여행을 하면서 공항에서 자주 보았던 것이 바로 시로이코이비토(하안연인)라는 과자다. 첫 일본 방문지는 도쿄였는데 그때는 도쿄바나나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라 그것만 사 왔었다. 그 다음번 여행이 되어서야 정보가 좀 더 많아져서 시로이코이비토도 사 왔던 기억이 난다. 홋카이도에서 1969년에 만들기 시작한 이 과자는 얇은 초콜릿을 역시나 얇은 쿠키 두 개 사이에 끼워 넣은 형태의 달달구리로 우리나라의 쿠크다스를 생각하면 얼추 비슷하다. 쿠크다스보다는 조금 단단하고 초콜릿도 두꺼워서 먹는 맛이 조금 다르긴 하다. 홋카이도에서는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과자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공항 기념품점에서나 볼 수 있는 이른바 홋카이도 특산물이다. 이런 시로이코이비토를 생산하는 공장 옆에 견학을 겸해 테마파크 비슷하게 조성한 곳이 바로 시로이코이비토 파크다. 아기자기하게 조성해 놓은 견학코스를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코스인 판매점에서 지갑을 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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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정시에 시계탑의 인형쇼가 펼쳐진다.

     

     

    시로이코이비토파크의 관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내부에서 진행되는 공장견학 및 역사 등에 대한 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야외에 마련된 정원을 거닐며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고 매시간마다 시계탑과 주변에서 시작되는 인형극 공연을 보는 것이다. 전자는 돈을 따로 내야 하는데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더 먹겠노라며 손쉽게 단념할 수 있었다. 야외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아픈 발바닥을 쉬일 겸 벤치에 앉아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하나 시켰다. 홋카이도는 유제품이 유명한 고장으로 갖가지 특산물들이 있지만 내 최애는 역시 소프트아이스크림이다. 홋카이도 여행 중에 하루에 하나 이상씩은 꼬박꼬박 수혈했다. 야외에서 판매하는 시로이코이비토파크의 소프트아이스크림은 작은 것은 400엔, 큰 것은 550엔이었다. 나는 곱빼기주의자라 당연히 큰 것을 시켰다. 우유와 초코 두 맛을 다 보고 싶어서 믹스를 시켰는데 물론 맛은 있었지만 우유 본연의 맛을 느끼기에 조금 아쉬웠다. 다음에는 작은 것 두 개를 각각 먹어봐야지 하고 다짐했다. (아니, 두 개 다 큰 것으로 먹어야겠다!) 그렇게 앉아서 아기자기한 테마파크를 보며 힐링을 하고 있을 때 시계가 2시를 가리키며 팡파르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계탑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걷히고 그 안에서 동물과 사람들이 이동하며 음악을 연주했다. 저쪽 벽에선 요리사들이 나와 오페라인듯한 노래를 불러 젖혔고, 이쪽 벽에선 나팔을 불며 앞뒤로 춤을 추었다. 바닥의 작은 새집에선 새들도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어디선가 비누거품이 나오면서 시계탑을 감쌌다. 순간 여기까지 오면서 투덜거렸던 고생길은 잊어버리고 동화 속에 들어와 앉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세계가 동화라면 나는 분명 아기돼지 삼 형제 중 막내일 테지. '벽돌집을 짓고 따듯한 곳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라는 상상을 하며 그 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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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이코이비토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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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이코이비토파크

     

     

    사실 시로이코이비토파크에 큰 관심을 가지고 간 것은 아니라서 가볍게 관람을 마치고 바로 숙소로 이동을 시작했다. 올 때 까짓 거 좀 걷지 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광활한 삿포로에 기가 꺾여있던 나는 (이미 갖고 있는 패스로) 따로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JR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사철 도자이선에 탑승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역이 있는데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안 그래도 잠도 많이 못 자서 피곤한 몸인데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하며 290엔으로 만끽하는 지하세계의 문명에 감탄했다. 

    내가 숙소로 정한 곳은 '플랫 호스텔 케이큐 삿포로 스카이'라는 곳이었다. 3박 4일에 총 5만 6천 원 정도 하는 곳으로 나 같은 헝그리 여행자에게 적합한 곳이었다. 대충 스스키노라는 삿포로의 번화가 근처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상태라서 도자이선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역인 오도리역에서 내려 구글지도로 검색하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삿포로 TV타워도 얼핏 스쳐가고 커다란 상점가도 지나갔다. 한창 도로공사 중인 곳을 지나 플랫호스텔 간판을 확인하고 안에 들어가 예약한 바우처를 내미니 이곳이 아니란다. 물어보니 플랫 호스텔 케이큐가 하나 더 있단다. 내가 예약한 곳은 '스카이'고 여기는 '이치바'란다. 어쩐지 동선이 되게 좋은데 저렴하다 했다. 죄송하단 인사를 꿉뻑 올리고 잽싸게 튀어나와 다시 검색을 해보니 몇 블록은 더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아까 시로이코이비토파크까지 걸어갔던 여파가 아직 남아있었는데 하늘이 노래졌다. (오도리역에서 내리면 안 되는 거였다.) 길바닥에서 잠들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또 터덜터덜 걸어갔다. 덕분에 삿포로 시내의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니조시장 옆을 지나갔는데 그 유명한 유바리멜론을 보고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홋카이도에 있는 동안 유바리메론을 먹어볼 기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오늘의 교훈. 눈에 띄면 나중에 말고 지금 먹어라!

     

     

    니조시장
    삿포로TV타워
    작은 실개천
    상점가
    건물 위에 불상이 올라가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어디는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는 곳도 있다던데?
    내가 묵은 숙소, 플랫 호스텔 케이큐 스카이

     

     

     

    숙소는 삿포로 중심지에서 꽤나 벗어난 곳에 있었다. 그래도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숙소가 외관상 꽤나 깔끔해 보여서 안심할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편의점도 하나 있어서 손쉽게 군것질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체크인을 하면서 JR티켓창구에서 어버버거렸던 기억이 떠올라 불안한 마음에 시작부터 영어를 썼는데 카운터에 계신 분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오랜만의 여행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언어장벽이었다. 일본어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다. 잘생긴 청년이었지만 고객응대가 꽤나 차갑다고 느껴질 정도로 미소 없는 친구였는데 그래도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고 부탁도 잘 들어주어서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요즘 말하는 냉미남이란 것인가. 

    도미토리의 1층에 배정을 받아 짐을 풀었다. 갈아입을 옷이며 각종 잡다한 물건들을 침대에 늘어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저녁에 여행정보를 검색할 생각으로 들고 온 태블릿이 자물쇠가 달린 사물함에 들어가지 않아 카운터에 맡겼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가방에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욕심은 고통의 근원이라던 이야기가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그렇게 바락바락 싸들고 다녔던가.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다. 아마 나는 시간과 공간만 바뀐 어디에선가 똑같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똑같은 후회를 다시 하고 있을 것이다. 

     

    도미토리의 2층침대 아랫칸

     

     

    숙소가 교통편이 참 별로라는 생각이 다시금 드는 것이, 사철을 타러 가도 짧은 네 블록을 걸어야 했고 노면전차를 타러 가도 긴 다섯 블록을 걸어야 했다. 당연히 나 같은 뚜벅이에게 택시는 사치다. 택시 한번 탈 돈이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수십 번은 더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철에 쓰는 돈도 아까워서 새벽마다 삿포로역까지 2.1km를 걸어 다닌 나였다. (돌아올 때도 걸어왔다) 여행지에서 분명 이것저것 잘 먹고 다녔는데 집에 와보니 4kg이 빠져있었다. 왠지 다리도 튼실해진 느낌이 건강을 회복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또 한참을 걸어 노면전차에 탑승하고 로프웨이이리구치 정거장에서 하차했다. 목적지는 모이와야마 전망대였다. 

    홋카이도에는 3대 야경이 있다고 한다. 하코다테야마(하코다테), 텐구야마(오타루), 모이와야마(삿포로)의 야경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하코다테야마의 야경은 세계 3대 야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텐구야마를 제외하고 남은 두 개의 야경을 보았는데 둘 다 끝내줬다. (그렇게 조사를 열심히 했는데 텐구야마 전망대를 왜 몰랐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참고로 모이와야마의 야경은 일본 신 3대 야경에도 꼽히고 있다. 밴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일본에도 삿포로에도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일본 신 3대 야경에는 나가사키의 이나사야마 야경과 고베 롯코산 야경이 포함되는데, 이나사야마 전망대에 가봤던 나로서는 모이와야마가 훨씬 좋았다. (나가사키 미안해요.)

    노면전차에서 하차해서 조금만 걸으면 전망대로 가는 셔틀버스를 탑승할 수 있다. 다만 버스 간격이 조금 긴 편이었다. 아직은 빛이 조금 남아있는 삿포로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나는 마음이 급했다. 셔틀버스가 방금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걸어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걸어서 가지 못할 정도의 거리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경사가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전망대로 가는 로프웨이 입구에 도착하자 숨이 턱에 차올랐다. 조명도 많지 않은 외진 산길을 슬쩍 오르니 꽤나 세련된 로프웨이 건물이 나를 반겼다. 숨을 잠시 고르고 다시 몇 층인가 건물을 올라 티켓을 구입하고 로프웨이에 몸을 실었다.

     

    모이와야마 전망대 로프웨이 입구
    모이와야마를 오르며 본 삿포로의 모습

     

     

    삿포로라는 도시를 조금 얕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홋카이도는 자연경관이 멋진 곳이고 눈이 많이 쌓이는, 노면전차가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는 지방의 소도시(?!)라는 것이었다. 삿포로역이나 숙소가 있는 스스키노라는 번화가를 보면서도 '이 근방만 조금 발전되어 있고 큰 도시는 아니겠지'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실제로 시로이코이비토파크 주변도 낮은 건물이나 공장 정도가 띄엄띄엄 있는 한적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고정되어가고 있던 찰나였다. 로프웨이가 두둥실하고 떠오르자 점점 삿포로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빼곡히 들어선 빌딩과 반짝이는 마천루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있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홋카이도의 인구가 500만이고 그중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200만 정도가 삿포로에 살고 있었다. 소도시라고 할 규모가 아니었던 것이다. 

    로프웨이에서 내려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조금 더 올라가니 비로소 모이와야마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케이블카라고 부르는 매달려 가는 삭도를 일본에선 로프웨이라 하고, 하단 케이블을 이용해 선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을 일본에선 케이블카라 한다.) 이제 슬슬 사람들이 야경을 보러 올라올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이라서 그랬는지 아직 전망대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산 너머로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멋진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고, 삿포로방향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삿포로역을 중심으로 몇 블록 정도는 높은 빌딩이 여러 가지 색색으로 빛나고 있어 주변의 낮은 주황색 가로등빛과 대조적으로 화려하게 보였다. 사진을 찍고 보니 마치 여러가지 큼직한 보석이 주황빛 작은 보석들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3대 야경이니 100선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았는데, 모이와야마의 야경에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낑낑거리며 삼각대를 들고 다녔던 결정은 감히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놓치고 싶지 않은 야경을 프레임에 담을 수 있었다. 

     

     

    모이와야마 너머의 노을
    삿포로시내 야경

     

    삿포로 시내 야경

     

    삿포로 시내 야경
    삿포로 시내 야경
    삿포로 시내 야경

     

     

    삿포로의 밤은 과연 만만치 않았다. 바람막이 하나만 입고 버티고 있자니 차가워진 공기며 바람이 슬슬 뼛속으로 파고들려 애쓰고 있었다. 둘둘 짝지은 연인들이 올라와 사랑의 종을 울렸고,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놀러 온 경우도 많이 보였다. 왠지 혼자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은 풍경도 충분히 보았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토산품점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자니 검은색 귀인지 팔인지를 하고 있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모이와야마의 캐릭터였던 것 같다. 2022년 10월에 방문할 당시에는 잘 몰랐던 점인데 2023년이 사실 검은 토끼의 해란다. 이제와 여행기를 쓰며 사진을 다시 보고 있자니 왠지 검은 토끼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당시에 캐릭터를 보았을 땐 뭐 이리 기괴한 것이 다 있나 하는 생각밖엔 없었지만. 

     

     

    모이와야마 전망대 캐릭터

     

     

    올라갈 땐 대기 없이 수월하게 올라왔는데, 어느새 전망대에 사람이 많이 올라와있었던 모양이다. 내려갈 때는 줄을 한참 서고도 한 팀을 먼저 보낸 뒤에서야 내려갈 수 있었다. 오늘의 목표했던 곳들을 모두 방문하고 나자 쌓여있던 피로가 본격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실 전날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 아닌가. 약간의 흥분상태로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긴장이 조금 풀렸던 듯싶다. 나름 비워둔 가방이 다시 묵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망대를 내려와 건물 앞으로 나가니 셔틀버스에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한 사람만 더 타시라고 하는데 내 앞에 있는 두 명이 일행이었는지 다음에 타겠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타면 되겠구나 하면서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뒤에 있던 웬 인간이 앞으로 훌쩍 뛰어가 버스에 탑승했다. 그리고 곧이어 버스가 문을 닫고 출발해 버렸다. 한 동안 경험해 본 적 없는 새치기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벙쪄있다가 하릴없이 다시 노면전차가 있는 곳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황당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앞의 두 사람과 나까지를 일행이라고 생각한 내 뒷사람의 오해였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여행에서 기분 나쁜 일이 종종 생길 수 있지만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것은 내 손해인 것 같다. 피곤은 했지만 너무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라멘신겐. 언젠간 먹고말꺼야
    밤에 본 모습이 임팩트있었던 신영사

     

     

    중간에 저녁 먹을 시간이 없어 슬슬 배가 고파지던 차에 노면전차에서 하차해 숙소로 이동하려는 와중에 어디서 많이 보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삿포로에 가면 꼭 들러보라는 유명 맛집 '라면 신겐'이었다. 줄 서서 밥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시간이 되면 가봐야지 정도로 생각했던 곳인데 나도 모르게 그 근처를 지나가게 되자 슬쩍 욕심이 났다. 일부러 지나가면서 보니 밖에까지는 줄을 서있지 않았는데 실내에 사람이 좀 앉아있었다. 다음에도 이 정도 줄이면 기다려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몸이 피곤해서 앉아서 기다리고 할 체력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앞서 유바리멜론 이야기 때도 그렇지만, 눈에 띄고 기회가 있을 때 먹어야 한다. 내가 다음날 저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가게 바깥까지 줄이 용트림을 하고 있었고, 나는 라멘신겐의 맛을 아직도 궁금해만 하고 있다. 

    편의점에서 가볍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사서 숙소에 들어갔다.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다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진 것 같았다. 호로요이 한 캔을 마시며 나에게 허락된 한 칸 침대에 몸을 뉘었다. 오늘 당겨 쓴 일정 덕분에 비어버린 내일 오전 계획을 세우기 위해 태블릿을 펼쳤다. 그렇게 배에 태블릿을 올린 채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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