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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2)
    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23. 1. 18. 22:03

     

     

     

    2일차 원래 일정

     

    2일 차의 일정은 원래 오전 중에 시로이코이비토파크를 관람하고 오후에 오타루로 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날 시간이 남아서 그 일정을 당겨 썼기 때문에 2일 차 오전 일정이 비어버리게 되었다. 계획을 세워두고 자려고 했었는데 조사를 하려고 준비만 한 상태로 잠들어버렸다. 일어나 보니 배 위에서 태블릿이 들숨날숨과 함께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배에서 떨어지지 않은 걸 보면 꼼짝하지 못하고 기절을 했던 듯하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쯤이었다. 이불도 덮지 못하고 잤더니 온몸이 얼음장이었다. 삿포로 겨울이 무섭다던데 가을이었지만 간접 체험을 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무튼 눈을 좀 비비고 오전일정을 고민하다가 전날 비행기에서 보았던 후지산같이 생긴 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랴부랴 조사해 보니 산 이름은 요테이산이었다. 홋카이도의 후지산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걸 보니 제대로 찾은 듯싶었다. 요테이산을 보기 좋은 곳을 찾아보니 니세코의 타카하시 밀크공방이라는 곳이 경관이 아주 좋다고 했다. 구글지도로 검색해 굿찬이라는 곳을 경유하여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코스를 추천받았는데 거리가 좀 있어서 그런지 택시비가 무시무시했다. 택시를 탈 때 타더라도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타고 가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어 좀 더 알아보았다. 타카하시 밀크공방에 좀 더 가까운 니세코역까지 이동한 뒤에 택시를 타는 것으로 검색했더니 한결 부담이 덜했다. (동계에는 굿찬에서 가는 버스도 운행하는 듯 하지만 이 당시는 검색이 되지 않았다.) 가장 일찍 갈 수 있는 열차를 알아봤는데도 오전 7시가 좀 넘어야 출발하는 것으로 나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샤워실을 쓰는 사람이 없어 여유 있게 뜨끈한 물로 몸을 한참 지지고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삿포로 스스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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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역 가는 길

     

     

    삿포로시내를 한참 걸어 삿포로역으로 향했다. 여전히 교통비를 아껴야겠다는 알량한 생각으로(어제 일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삿포로역까지 걸어가다 보니 힘은 들었지만 풍경이 좋았다. 특히 사람이 없는 깔끔한 풍경사진을 선호하는 내게 최적의 시간이었다. 찬바람이 제대로 불기 직전의 가을 홋카이도라 단풍이 든 잎사귀들이 아직 나무에 매달려있어 거리가 깔끔했다. 특히 좋았던 것은 삿포로가 근현대에 들어와서야 개척된 계획도시라서 도로가 사통팔달로 쭉쭉 뻗어있었던 점이다. 하지만 이런 깔끔한 도시구획 뒤에는 원주민들의 슬픔이 있다. 

    홋카이도는 원래 아이누족이라는 일본 본토인들과는 좀 다른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문화도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이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북쪽의 추운 땅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15세기에 이르러 홋카이도 아래쪽에 일본인들이 건너와 자리를 잡고 쇼군으로부터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들은 아이누족으로부터 생선과 모피를 받고 무기를 포함한 금속제품이나 쌀 등을 팔았는데, 독점적인 거래였던 데다 상당히 강압적이어서 아이누족으로부터 큰 반란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19세기에 이르러선 완전히 복속되어 식민지화된 데다 학살이 병행된 민족문화말살정책이 시행되어 세력이 크게 쇠퇴했다. 본토인들은 아이누족을 덜 진화한 인간으로 취급했고 한때는 "홋카이도에는 곰과 아이누가 산다."라고 교과서에 실려서 학생들이 아이누를 동물의 일종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이누인들은 홋카이도뿐 아니라 러시아 쿠릴열도 등에도 퍼져 살고 있었는데, 한때는 러시아에서도 탄압당했지만 쿠릴열도의 영토분쟁(일본의 북방영토라는 주장 VS 러시아의 쿠릴열도라는 주장)이 일어나면서 러시아가 갑자기 아이누족의 지위를 인정했고(그렇게 함으로써 쿠릴열도에 살고 있던 아이누족이 러시아인이니 그곳이 러시아땅이라는 논리를 주장) 일본도 허겁지겁 아이누족을 원주민으로 인정하며 대응했다. 이래저래 국제정세에까지 자신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취급되고 있는 모습이다. 참고로 홋카이도의 지명들에서 아이누어를 자주 살펴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삿포로는 "커다란 마른 강 = 평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오타루는 "모래 사이 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 둘 다 강으로 끝나는데 왜 발음이 다르지?)

     

     

    홋카이도 시계탑 근처 검은 리본

     

     

    삿포로 시계탑을 지나가려 하는데 도로를 향한 표지판 뒤쪽에 검은 리본이 붙어있었다. 아마 전날인 10월 31일이 핼러윈이라서 누군가가 입고 있던 옷에서 떼어 붙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일본은 핼러윈에 꽤나 진심인 나라 중에 하나다. 20년도 더 전부터 핼러윈이벤트를 성대하게 하고 있다. 사실 본래 핼러윈의 의미는 상당히 희석된 상태라 이제는 인싸들의 코스튬플레이 데이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단체주의가 강한 일본에서 평소 자신의 모습과 다른 분장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런데 검은 리본을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출국하기 이틀 전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로 159명이 목숨을 잃었다. 내겐 저 리본이 마치 근조리본처럼 느껴진 까닭이다. 원인을 밝히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서로를 헐뜯으며 화낼 상대를 찾기 이전에 무엇보다 인간 된 도리로서 아까운 젊은 생명이 사라진 데 대한 애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검은 리본 앞에서 나는 잠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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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 시계탑

     

     

    삿포로역으로 가는 길에서 드디어 시계탑을 만났다. 현 홋카이도대학의 전신이었던 삿포로 농학교의 연무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건축된 것은 아니고 다른 자리에 있던 것을 옮겨심었(?!)다고 한다. (일본은 가끔 보면 천수각도 옮겨 짓고 한다.) 주변의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옛 건물이라서 막상 직접 보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랜드마크로 유명하다. 일부러 보러 갈 생각은 없었는데 지나가다 발견하고는 안 볼 수 없었다. 랜드마크의 이름이 되는 시계탑 자체는 생각보다 작은데, 그래도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사방으로 보이는 시계가 학교 중앙에 있었으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시계도 잘 보이게 놓아줬는데 지각을 해? 라면서 꾸중을 한다던가.)

    이 건물의 또 하나의 특징은 붉은 오각별 마크다. 오각별마크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심벌 중 하나이기 때문에 혹시 홋카이도에 공산국가가 들어선 적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 크게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있어 언급하고자 한다. 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홋카이도를 통치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개척사가 설치되었다. 본토와 북해도는 바다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해운의 필요성이 생겼고, 외국형 선박들을 수입해서 이 수요를 채웠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는 외국형 선박에 국기와 번(지역토호)기를 걸도록 규정이 되어있었다. 개척사는 번이 아니라서 따로 깃발이 없었던 관계로 부랴부랴 마크를 만들어 제출했다고 한다. 이때 만든 것이 푸른 바탕에 붉은 오각별이 새겨진 북진기다. 깃발을 입안한 사람은 에비코 스에지로 란 사람인데 하코다테의 고료카쿠를 설계한 다케다 아야사부로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북진기가 고료카쿠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항해에 있어 방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홀로 빛나는 별인 북극성을 모티프로 했다는 설도 있는데 둘 다 영향이 있었겠거니 싶다. 후에 칠각별로 변경하고 싶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만든 지 반년도 안되었는데 뭘 바꾸냐며 정부로부터 퇴짜를 맞았다고 하는데, 이 칠각별은 후에 홋카이도기로 부활하게 된다. 아무튼 홋카이도의 상징이 된 오각별은 삿포로 시계탑에도 새겨져 있지만, 개척사에서 만든 맥주회사의 심벌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삿포로맥주이다. 그래서 삿포로 맥주병과 캔에도 오각별이 있고, 맥주박물관이나 팩토리 건물에도 오각별이 새겨져 있다. 구 홋카이도청 건물에도 있고 아무튼 홋카이도에서 옛 건물인데 오각별이 있다 하면 위와 같은 유래라고 생각하면 된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삿포로역이 있는 스텔라플레이스 전면의 거대한 시계면에 새겨진 별들에도 위와 같은 유래에서 기인한 오각별들이 있다는 점이다. 홋카이도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관심이 있다면 아래의 링크를 읽어보면 좋겠다.

     

    https://hokkaidofan.com/hokkaido-flag/

     

    開拓使のシンボルはなぜ五稜星になったの?知られざる北辰旗の歴史

    サッポロビール博物館、札幌開拓使麦酒醸造所、札幌市時計台、北海道庁旧本庁舎(赤れんが庁舎)、豊平館、清華亭、北海道大学北方生物圏フィールド科学センター植物園の博物館本館。

    hokkaidofan.com

     

     

     

    오타루로 가는 길에 만난 바다풍경

     

     

    요테이산을 보기 위해 먼저 오타루행 열차에 탑승했다. 홋카이도의 서북쪽 바다를 스치듯 지나가기 때문에 바다풍경을 보기 위해 오른쪽 자리를 예매했다. 이렇게 해변을 달리는 열차를 타게 되면 어느 쪽 좌석에 앉아야 하는지 미리 알아두는 것도 여행의 작은 팁이라면 팁이다. 햇빛을 받으면서 가면 이마가 너무 뜨겁기 때문에 창가 쪽이 동쪽인지 서쪽인지도 따져보는 것이 좋다. 이건 버스, 비행기, 열차 어디서든 통용되는 팁이다. 넘실거리는 바닷가를 바로 옆으로 두고 달리는 풍경은 각별했다.

    사람을 잔뜩 실은 열차가 오타루역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이 대거 내리는 걸 보면 아마도 관광객인듯 싶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곧바로 오타루를 관람하고 싶었지만 니세코에 다녀온 뒤로 미뤄두어야 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굿찬역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다. 이 시기에 굿찬행 열차를 타는 사람은 아주 소수의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현지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타루까지는 그래도 삿포로역에서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도시권이었지만 그 뒤로는 정말 산골짜기 길을 구불구불 두량짜리 열차가  헤치고 지나가는 산골짝이었다. 역간 간격이 길어서 그런 건지 겨우 두량짜리 열차주제에 안에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이 얼마나 깡시골이었나 하면 이따금씩 길게 자란 나뭇가지가 열차 전면을 때리고 지나갔고, 유심이 LTE는커녕 3G도 잡지 못하는 구간이 꽤나 길게 지속될 정도였다. 이런 산골짜기에 열차노선이 지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역사도 나무로 지어진 것이 많아 내가 열차를 탄 것인지 타임머신을 탄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 즈음 굿찬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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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찬역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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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찬역 풍경

     

     

    굿찬 역전풍경

     

    굿찬역에서 만난 요테이산

     

     

    굿찬역에 내려서 니세코역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하는데 시간 간격이 있어 30분 정도가 붕 떴다. 어디 멀리까지 나가기는 애매한 시간이라서 역 밖으로 나와 근처를 어슬렁거려 보았다. 인구 1만 5천의 작은 도시지만 역은 꽤나 컸다. 상주하는 사람들 이외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좀 되는 곳이라는 뜻이리라. 주로 겨울철 스키를 타려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내가 갔을 땐 눈이 아직 오지 않은 때였으므로 이용하는 승객이 적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역 앞으로 길게 뻗은 도로를 보며 속이 뻥 뚫리는 체험을 하고 있을 때 저쪽 구름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짙어서 그냥 어두운 곳인가 했던 것이 사실은 산이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목적지로 하고 있는 요테이산이었다. 1,898m의 높이로 홋카이도에서도 다이세츠잔 국립공원의 연봉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비록 후지산의 높이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주변에 높은 산 없이 홀로 솟은 화산의 위용이 대단했다. 산 정상 부분은 본격적으로 구름에 묻혀있어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래도 산 정상 주변에서 물안개 같은 김이 모락모락 이는 것이 신비로웠다. 전체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으면 싶었지만 날씨가 좋지 못한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다. 니세코에 가는 동안 조금 날씨가 개지나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만 있을 뿐이었다. 짧은 어슬렁을 끝내고 열차시간이 되어 니세코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니세코역 가는 길

     

     

    오타루에서 굿찬까지의 산골짜기를 한번 더 업그레이드 한 진짜 산골짝을 거슬러 올라 니세코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한량짜리 열차로 앉은자리에서 앞창과 뒤창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한 줄짜리 기찻길이 전부인 숲 속을 지나 도착한 니세코역 자체에는 사실 큰 기대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깊은 산속에 들어왔는데 역에 뭐가 볼 게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간에 지나친 역들도 거의 간이역에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니세코역은 아니었다. 다른 역과 달리 외관부터 상당히 잘 꾸며져 있었다. 중세 스위스의 농장건물을 빼다 박은 외관과 핼러윈을 위해 역 앞에 잔뜩 쌓아놓은 호박과 마차까지, 관광객을 받아들일 준비가 만반이었다. 겨울이 오면 스키장이 오픈되고 사람들이 많이 찾을 곳이라서 관리가 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잠시 역 풍경을 구경하다 나의 목적지인 타카하시 밀크공방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찾아보았는데 눈 씻고 찾아보아도 택시가 들어올 분위기가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버스노선도 알아봤는데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아름다운 계획표 속에선 우아하게 택시를 타고 "아노 와타시와 타카하시 보쿠죠에 이키타이데스(저기, 저는 타카하시 목장에 가고 싶어요)"라는 문장을 말할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정작 그 대사를 들어줄 택시기사가 오지 않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택시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도보로라도 가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구글지도를 확인해 보니 가는데만 1시간 좀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풍경도 보고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찬찬히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역 뒷방향을 향해 걸었다. 

     

     

    니세코역 앞 호박무더기

     

     

    역에서 바로 건너편으로 바로 갈 수가 없어서 길을 빙 돌아 철도 건널목을 건너고서도 또 한참을 걸었는데 아직도 역에서 직선거리로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아 보였다. 슬슬 걷는 것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근처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찾는 가게인 듯 외국어가 잔뜩 적힌 라멘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도 영업 중이 아니었다. 배가 고팠지만 근처에서 밥을 먹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편의점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었다. 좁은 도로에 가끔이지만 커다란 덤프트럭이 쌩쌩 지나다니는 모습이 전부라 이미 상당히 쫄아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다리에 인도가 아예 없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차가 이렇게 달리는 다리인데 인도가 없다니. 건너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다리 건너서 보이는 교차로까지만 가보자 마음먹고 차가 안 올 때를 골라 잽싸게 다리를 건넜다. 다리 양쪽으로는 단풍이 울긋불긋하게 들은 시리베츠강이 멋지게 흐르고 있었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강 같았다. 어디선가 브래드피트가 나타나 플라이낚시를 멋지게 흔들고 있을 것 같은 그런 풍경이었달까.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면서도 강의 풍경에서 한참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니세코 시리베츠강
    니세코 시리베츠강

     

     

    강을 건너 조금 위쪽의 교차로까지 갔는데도 결국 인도는 없었다. 인도가 없는 도로가 나를 저승으로 인도할 수 있었기에 그 정도 모험에서 깔끔하게 접기로 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용기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도 용기다. 아무래도 타카하시 밀크공방은 다음번에 날씨가 더 좋을 때를 기약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날씨가 좋지 않아서 요테이산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도 빠른 포기에 도움이 되었다. 다시 조심조심 니세코역으로 돌아오니 다음 열차 시간까지 1시간이 넘게 남아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열차를 기다리기보다는 남은 시간으로 니세코 마을을 조금 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역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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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세코 주변 풍경

     

     

    역 앞에 제법 크고 세련된 건물이 있었는데 뭐 하는 곳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꽤나 유명한 온천이라고 했다. 그 옆에는 니세코 라디오 스튜디오가 있었다. 나름 76.2 MHz라는 주파수도 부여받은 본격적인 라디오 스튜디오였다. 작은 도시에 무슨 라디오스튜디오까지 따로 있는가 싶었는데 노령인구가 많아 인터넷 등의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NHK 같은 전국단위 방송이 아닌 지역정보를 담은 커뮤니티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니세코 리조트 관광협회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라디오 코너 운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지만 라디오를 들을 방법이 없었던 데다 들을 수 있더라도 일본어가 일천한 실력이라 그저 궁금증으로 남길뿐이었다. 이후에도 코인세탁소니 작은 과일가게 등이 나타났지만 모두 문이 닫힌 상태였다. 이른 시간이라서라고 하기에는 동네 자체가 상점이 활발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20여분을 언덕을 따라 오르면서도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았고 이따금씩 차가 한두 대씩 지나갈 뿐이었다. 그래도 길을 걷다 예쁜 골목길이라도 나오면 그런대로 즐기면서 걸을 수 있겠는데 그렇지도 않은 정말 평범한 마을풍경이었다. 오기가 나서 길 끝에 다리인지 공원인지 모를 구조물이 있는 곳까지는 걸어가 보겠다며 열심히 걸었다. 여전히 밥집 하나 문 연 곳이 없었고, 아담한 종합병원 앞에 약국 하나가 간신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배고프다고 약을 사 먹을 순 없지 않은가. 굶주림을 참고 조금 더 걸어가니 구조물이 있던 곳은 니세코정립 소학교였다. 둥그런 운동장 뒤로 학교 건물이 서있었는데 재미난 것은 담장이 전혀 없었다. 축구공이라도 잘못 찼다간 니세코역까지 굴러갈 것 같은 탁 트인 느낌이었다. 운동장에는 정글짐과 미끄럼틀이 있었고 바닥엔 색을 입힌 타이어가 반씩 묻혀있었다. 추억 속의 초등학교 풍경이었다. 이 작은 도시에도 초등학생들이 있어 학교가 운영되고 있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니세코 풍경
    할로윈 장식이 된 니세코역 풍경

     

     

    보통 여행지에서 시간이 붕 뜨게 되면 나는 다음 열차나 버스가 올 때까지의 시간을 계산한다. 그 시간을 절반을 쪼개 걸어 다니며 구경하면 돌아올 시간이 절반이 남아서 나름 합리적인 잔잔바리 관광이 가능하다. 물론 구경을 하다 뭔가 시간을 들여 더 볼만한 것이 있으면 열차를 하나 보내고 다음열차를 타도 된다고 생각하면 넉넉하다. 아쉽게도 니세코에서 남은 절반의 시간동안 더 볼 것은 없었고 나는 냉큼 발을 돌려 역으로 돌아왔다. 사실 역에서 초등학교까지 걷는 길이 점차 고도가 높아지는 지형이라서 요테이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는데 날씨 때문인지 방향 때문인지 전혀 볼 수 없었다. 역으로 돌아와 만난 니세코 관광안내표지판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의 요테이산이 그려져 있어 나를 아쉽게 했다. 이 아쉬움을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와 풀 수 있을는지. 여전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라 자판기에서 따뜻한 호지차 페트병을 사서 소소하게 배를 채우고 있자니 열차가 도착했다. 오전은 공쳤다 치고 오후에 본격적인 오타루 관람을 해야겠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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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세코 관광 안내 표지

     

    오타루로 돌아가는 열차

     

     

    기차역으로 오타루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선구자들이 남긴 팁은 "미나미오타루역"에서 내려서 "오타루"역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관람하라는 것이다. 오타루역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내리는 데다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르르 몰려다니게 되어 호젓한 관광이 힘든 반면에 미나미오타루역에서는 사람도 많이 내리지 않고 무더기 관광객과는 반대로 움직이게 되어 여유로운 관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굿찬에서 갈아탄 열차의 종점이 오타루역이었던 관계로 그냥 오타루역에서 관광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사람이 많이 들어오는 시간은 아니었는지 내리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비수기 홋카이도가 나에게 축복을 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 앞으로 나오니 쭉 뻗은 도로 너머로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다. 아직은 오타루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만한 부분은 없는 작은 도심지일 뿐이었다. 

     

     

    오타루역 전경
    오타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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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시장

     

     

    역에서 나오자마자 좌측으로 "삼각시장"이라고 쓰인 새빨간 간판이 보였다. 역 주차장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곳에 입구 하나가 있을 뿐인 시장이라 눈에 잘 띄지 않을 위험이 있었는데 "나를 좀 봐줘요!"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간판 덕분에 시선을 강탈당했다. 해산물이 유명한 홋카이도에서도 해산물을 '가득'린 덮밥을 파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방송에도 몇 번 나왔던 것으로 아는데 생각보다 입구가 보잘것없어서 놀랐다.

    안에 들어가니 신선한 비린내음이 풍겨왔고 입구 근처엔 건어물 등 오미야게(선물용 지방 특산물)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길게 뻗은 복도를 계속 따라 들어가니 해산물덮밥을 파는 곳들이 늘어서있었다. 이 시장에서 유명한 음식은 바로 삼색덮밥(三色산쇼쿠동)이다. 해산물 3종을 밥그릇 위에 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얹어서 파는 덮밥이다. 해산물덮밥(海鮮카이센동)이 너무 흔해서 특색을 부여하고자 만든 음식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연어알, 성게알, 게살, 연어, 참치 등 원하는 해산물이 듬뿍 올라간 화려한 덮밥이 시선을 확 잡아 끈다. 가격이 보통 한 그릇에 최소 2만 원 이상 하고 비싸게는 5만 원까지도 하는데 '그래도 여행기분 내려면 한 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내가 좀 더 여유 있는 여행자였다면 경험 삼아한 그릇 해봤겠지만 나는 아직 가성비가 중요한 사람이라서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화려하긴 했지만 밥그릇이 작기도 했고.) 언젠가 주머니사정이 넉넉해지면 먹어볼 리스트로 마음속 노트에 적어두었다.(노트가 미어터지는 중이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호객행위가 상당하지만 그렇다고 강제적이진 않아서 적당히 사람 사는 내음을 느끼게 했다. 

    참고로 여행기를 작성하면서 알게 된 丼(우물 정 의 이체자)의 유래가 꽤나 재미나서 여기에 남겨본다. 丼는 아주 오래전에는 우물정(井) 자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했던 한자인데 "우물에 무언가 떨어져서 나는 소리 '담'"으로 발음되기도 했다. (중학교 때 丼라는 글자가 "퐁당 퐁"이라는 한자라고 말씀해 주신 한자선생님의 우스갯소리가 완전한 우스갯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물정(井) 자가 우물을 의미하는 한자로 굳어지면서 가운데 점이 들어간 한자인 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 일본에서 돈부리의 (돈) 자를 표기하기 위해 발음이 같았던 丼을 차용했다고 한다. 이후 우물이라는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는 돈부리를 의미하는 한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심지어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중화권에서도 丼는 돈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012
    오타루 운하프라자

     

     

    삼색시장을 구경한 후 오타루역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운하를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폐선된 기찻길인 테미야 선이 있었다. 일본에선 3번째, 홋카이도에선 최초로 개통된 철도가 지나던 길인데 현재는 운행하지 않고 기찻길만 남아있다고 한다. 봄여름에는 잔디도 좀 있고, 겨울에는 오타루눈축제를 위해 잘 꾸며져 점등도 된다고 하는데 가을엔 딱히 볼 것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이따금씩 커플들이 선로에서 손을 마주 잡고 걸어가는 등의 모습이 보였다. 나 홀로 여행객인 나에겐 그저 부러운 풍경일 뿐이다. 조케따이쒸. 

    철도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오타루 운하 플라자가 나온다. 현대식 건물들을 지나 갑자기 나타나는 넓은 공간에 큼직한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느낌의 건물에 조금 위화감을 느꼈는데, 예전에 운영하던 창고건물을 리모델링해서 현재 관광안내소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면 오미야게를 파는 작은 가게와 각종 관광 팸플릿을 비치한 곳이 나오고, 관광안내소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한쪽 벽면에는 유리잔을 피라미드처럼 세워놓아 계속 색이 변하는 조명을 설치하여 눈길을 끌고 있었다. 왠지 겨울에 보면 더 아련한 느낌을 줄 것 같은 장식이었다. 홋카이도가 눈의 도시라는 나의 편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운하 플라자는 영화 "러브레터"에도 등장하는 곳이라고 한다. 예전에 영화를 봤던 기억은 있는데 장소 같은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영화를 보면서 "저 장소에 가봐야겠어."라고 생각할 만큼 일본여행에 열망이 있던 시절도 아니긴 하다. 홋카이도에 오기 전에 러브레터를 다시 한번 보면서 예습을 할까 싶었는데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도 아니었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포기했었다. (내 감성은 이제 건어물이 된 듯하다.) 이제는 홋카이도에 다녀왔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 아는 장소들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미루지 말고 한번 더 봐야겠다. 

     

     

    오타루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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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루 운하

     

     

    운하박물관을 나와 그 뒤로 쭉 늘어서있는 창고군을 더 둘러보았다. 각종 공방들이 있는 곳이었다. 오타루의 또 하나의 명물이 유리공예이기 때문에 대부분 유리공예와 관련된 시설들이 많이 있었다. 나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부엉이장식을 하나 사드릴까 싶어 유심히 보았는데 정교한 것은 너무 비싸고 간단한 것은 너무 볼품이 없었다. 극과 극이었다. 다른 곳에서 그 중간즈음의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냥 구경만 하다 나왔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여기서 사는 게 제일 무난했지 않았나 싶다. 

    다시 운하박물관 쪽으로 돌아와서 길을 건너니 드디어 그 유명한 오타루 운하를 만날 수 있었다. 오타루 운하 풍경의 특징은 바로 클래식함이다. 시멘트로 발라 마무리한 운하가 아니라 깎은 돌을 맞물려 쌓아 울퉁불퉁하게 만든 운하와 산책로를 중심으로 한 쪽엔 붉은 벽돌을 사용해 레트로한 느낌을 주는 창고 등이 있고 반대쪽엔 도로와 각종 호텔 및 음식점 등이 있는 풍경이다. 마치 대항해시대의 리스본 같은 항구도시 느낌을 풍긴다. (물론 그 느낌은 내가 대항해시대 게임에서 경험한 것 정도가 바탕이지만) 운하를 오가며 관광을 할 수 있는 배는 모터보트긴 해도 옛날 배와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져서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 느낌이었다. 

    오타루운하는 물길을 파내서 만든 운하가 아니라 이미 바다이던 곳을 운하공간을 남겨놓고 그 건너편을 매립하여 지금의 형태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총연장은 1km가 넘고 깊이는 2.5미터 정도인데 사실 예전에 존폐의 위기가 한번 있었다. 일본 패전 후 오타루항이 재정비되어 메인 항구의 역할을 맡게 되자 운하가 필요 없게 되어 방치되었다. 그 와중에 오타루항까지 물류를 운반하는 도로가 너무 협소하다는 의견이 있어 오타루운하를 메우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현재 관광지로 사용되는 곳들에는 이렇게 주민 반대로 개발이 무산되어 살아남은 곳이 꽤 많다. 유후인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토론 끝에 북쪽 운하는 그대로 두기로 하고 남쪽운하는 폭을 줄여 도로를 넓히는데 썼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오타루 운하라고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이때 줄어든 남쪽 운하다. 이렇게 살려둔 운하가 오타루에 연 천만의 관광객이 찾게 하는데 일조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개발일색인 분위기도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은 부분이다. 

     

     

     

    012
    오타루 데누키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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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루 Allnight lamp(상야등)
    오타루 오르골당

     

     

    운하길을 따라 쭉 걸었는데 아무리 가도 사진과 영상에서 본 그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왼쪽으로는 공장의 커다란 신식 사일로들이 서있었고 오른쪽으로도 간간히 이름 모를 음식점들이 나오는 특색 없는 풍경이 계속되었다.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의심이 슬슬 들면서 다시 돌아가야 되나 생각을 하던 찰나 마침내 익히 보았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타루 오르골당이었다. 개화기 서양풍 건물의 외관에 자연스럽게 옥빛 녹이 슨 청동지붕, 중앙의 간판 부분엔 "오타루오르고루당"이라고 쓰여있었고 그 앞으로 증기시계가 있었다. 워낙에 널리 알려진 곳이라 바로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일단 스미요시신사를 봐야 하는 일정 때문에 잠시 뒤로 미루어두었다. 건물 내부는 시간이 지나도 조명빛으로 똑같지만 신사의 낮풍경은 시간이 지나면 사진에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사진촬영에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하나둘씩 올리면서 팔로워가 늘어났고 그러면서 사진 찍는 재미를 오랜만에 다시 느끼고 있던 차에 오게 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장비도 욕심을 부려 많이 챙겨 들고 다녔고 풍경이 좋다는 곳들도 미리 알아보았다. 눈에 담는 여행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여행을 제대로 추억하기 위해서는 사진과 기록이 필요하다. 물론 좋은 사진을 찍어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나는 관종인지도 모르겠다. 

     

     

    오타루 탄포포문고

     

     

    오르골당에서 남들 모두 걷는 상점거리방향으로 걷지 않고 미나미오타루역이 있는 방향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걸어 역에 도착했는데 그만큼을 더 걸어야 스미요시신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나 힘든 여정이었는데 중간에 만난 작은 서점 하나가 나의 기분을 따스하게 만들어주었다. 요즘엔 보기 힘든 동네의 작은 서점이었다. 서점 주인이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따로 모아 전시한 것 같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창문에 장식한 아기자기한 종이장식들이 귀여웠다. 일이 끝나면 접어서 가게 안에 들여놓을 접이식 목제입간판이 가게 밖에 서있었는데 직접 그린 듯한 색색의 글씨가 예뻤다. 가게가 작아 많은 책을 보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고 싶은 책이 있는 동네 주민은 서점 주인에게 무슨무슨 책을 구해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며칠의 즐거운 기다림 후엔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정감 있는 우리네 옛 동네서점의 풍경이 그려졌다. 택배에 익숙해진 지금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립고 반갑기는 한 그런 과거의 풍경이 그 서점에 있었다.  

     

     

    0123
    스미요시신사

     

     

    잠시 옛 추억에 젖어있다가 조금 더 걸어가니 스미요시신사의 모습이 보였다. 이 신사는 오타루를 찾는 사람들도 대부분 모르고 지나치는 곳 중에 하나다. 일단 신사 자체가 엄청 크거나 하지 않고 상점가가 발달한 것도 아닌 데다 주요 관광지에서 거리가 좀 있기 때문에 당일치기 방문객들은 혹여 알더라도 방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엔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오타루 앞바다가 있는 곳까지 한 번에 뻗은 도로와, 그 도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높은 단에 놓인 신사의 풍경이 꽤나 드라마틱했다. 가을이라 신사까지 난 길 좌우로 심은 나무에 노랗고 붉은 물이 들어있었고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낙엽들이 정취를 더했다. 개인적으로는 중간을 가로지르는 전선만 없다면 더욱 드라마틱한 풍경이 될 것 같은데, 신사가 사진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 그저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배가 고파서 그랬을까 이상하게 자꾸 스시요미(sushi yummy - 스시 맛있엉) 신사로 생각되어서 참 헷갈렸던 기억이다. 

    신사 앞까지 놓인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나니 숨이 찼다. 아무 데나 앉았다가 이따금씩 방문하는 참배객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서서 돌아다니며 숨을 골랐다. 우리가 한국에 온 일본인을 알아차리듯, 일본인들도 한국인 관광객을 한 번에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남자가 투블럭컷에 뿔테안경을 쓰면 거의 대부분 한국인이라고 한다.(난데?) 나도 돌아다니면서 말도 붙이기 전에 한국말로 인사를 받은 적이 많다. 전형적인 한국인인 모양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행실에 신경을 써서 한국인의 친절함과 올바름을 각인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한국인이 되기 위해 아무 데나 앉지 않고 서서 숨을 돌린 것이다.

    심호흡으로 정신을 좀 되찾자 오타루 앞바다까지 이어진 길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서 본모습도 멋지고 위에서 내려다 본모습도 멋져서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조용한 신사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곧게 뻗은 길 너머로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0123
    다시 오타루 상점가

     

     

    올라간 길을 다시 걸어 내려와 오르골당으로 돌아왔다. 여기부터가 진짜 오타루의 유명한 상점거리였다. 핼러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호박 가득한 광장 건너편에 오르골당이 있었다. 오타루 오르골당 건물은 약 100여 년 전 어떤 미곡상이 지은 본사였다고 한다. 오르골당 상점은 건물보다는 이전에 개업했지만 이후 이 건물을 매입하여 오르골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었다. 음악을 저장하고 재생할 방법이 없었던 그 옛날에 스위스의 시계장인이 당시 막 개발된 태엽장치를 이용하여 금속 편을 튕겨 소리를 내는 장치를 고안했다고 한다. 이후 네덜란드로 전해진 이 물건은 orgel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와 오루고루가 되어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아니 왜 오르게루가 아니고?) "옛날 사람에겐 오르골은 귀한 물건이라는 인식인데 요즘 사람들에겐 신기하고 값싼 장난감이라는 인식입니다."는 오르골당 관계자의 인터뷰를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축음기도 없던 옛날 분들에게 오르골은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겠지만 현대인들에겐 중국산이라면 싸게는 2,3천 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장난감이다. 하지만 그런 오르골이라도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할 수 있다면 다시 값비싼 물건이 될 수 있다. 오르골당에 들어가는 순간 5천 종 8만여 점의 오르골에 압도된다. 특히 형광등이 아닌 주황색 백열등으로 실내를 밝히고 있어 공간이 아늑하고 따사로운 느낌을 주는데 거기서 이미 오르골당이 주는 환상은 시작된다. 여기저기서 마음껏 만져볼 수 있도록 진열된 오르골들이 내는 소리가 마치 아기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의 자장가처럼 들려오면서 마음이 말랑해진다. 그리고 각종 장식이 태엽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만들어내는 비일상의 풍경 속에서 관광객은 자연스럽게 지갑을 열게 되는 것이다. 오르골의 가격은 저렴한 것도 한국돈으로 몇만 원씩은 하는 데다 비싼 것들은 백만 원대까지도 올라가기 때문에 숫자 0을 잘못 센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어머! 이렇게 예쁜데 10,000원밖에 안 해!! 아니 다시 보니 10,000엔이네??)

    오르골당 2층과 3층에는 만질 수 없는 고급품이나 캐릭터상품 등이 있고, 오르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오래된 기기들을 구경할 수도 있다. 지금은 고정된 원통을 굴려 짧은 음악을 재생하는 정도로만 생산되지만 옛날에는 긴 원판을 이용해 길게 재생되기도 했고 원판을 갈아가며 다른 노래를 들을 수도 있었던 모양이라 퍽 신기했다. 옛 오르골들의 소리를 들어볼 수 없었던 점은 조금 아쉬웠다. 오르골당 건물의 2,3층은 예전 건물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어 바닥도 나무바닥이었다. 걸을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소리가 들려 조금 무섭기도 했다. 특히 3층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은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간 가운데 부분이 움푹 파여있어 세월을 느끼게 해 주었다. 건물 자체가 주는 예스러움에 오르골이라는 소품이 더해져 시간여행을 제대로 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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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골당

     

    오르골당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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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루 오르골당 건너편 광장
    르타오 믹스 소프트아시스크림

     

     

     

    오르골당 건너편에는 작은 광장이 있었다. 핼러윈 호박인 '잭 오 랜턴' 장식이 커다랗게 광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들어가서 호박에 먹히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나도 들어가서 잡혀먹는 사진을 찍히고 싶었지만 홀로 여행자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여행사진을 찍을 때 가끔 이렇게 아쉬울 때가 있다. 풍경 사진은 잔뜩인데 내 사진은 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와 함께 갔어도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드는 내 사진을 찍을 능력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언젠가는 사진을 잘 찍는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서 서로 품앗이하며 인생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근데 내가 그사람보다 잘 못 찍으면?!?!)

    왁자지껄하게 사진을 찍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광장을 넘어서면 그 유명한 르타오 본점 건물이 있다. 르타오는 오타루의 유명한 디저트 전문점이다. 치즈케이크가 가장 유명하다고 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디저트들을 판매한다. 내가 사전조사를 위해 유튜브영상을 보면서 정말 귀에 인이 박히게 들은 것이 "르타오는 오타루를 거꾸로 한 것입니다."는 것이다. 르타오 이름을 정할 때 오타루 이름을 거꾸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유명 디저트점 이름의 유래치고는 조금 귀엽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열심히 언급하고 있고 결국엔 나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네이밍이 인지도에 주는 영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서울에 "울서 디저트카페"를 창업해 볼까?) 르타오 본점 2층에는 찻집처럼 운영하는 곳이 있어 차와 함께 한두 가지 케이크를 동시에 맛볼 수 있어 인기가 좋다고 했다. 나도 가보려고 했는데 엄청난 대기인원에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치즈케이크도 못 먹고 왔는데 조금 아쉽긴 하다. 한국 백화점에 입점해 있다고 하던데 한번 방문해볼까 싶다.

    아무튼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치즈+우유 믹스소프트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찾게 되고 말았다. 가까운 곳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어찌 홋카이도같이 먼 곳에 있단 말이오. 이는 마치 견우와 직녀의 이별과도 같이 느껴진다. 적절한 치즈향, 고소한 우유맛에 콘 자체에서도 커피 향이 나는듯한 은은한 맛이 느껴졌다. 앞으로 오타루를 찾는 사람들에겐 무조건 이 아이스크림을 추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르타오 본점 건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 종탑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종탑에 작은 종이 매달려있기도 하고 주변보다 아주 약간 더 높아서 오타루 상점거리를 조망하기에 꽤 괜찮은 곳이다. 오르는 사람이 많은 편도 아니었어서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다만 같은 시간에 올랐던 분들이 종을 너무 세게 쳐서 귀청이 떨어질 뻔했다. 작은 종이지만 소리가 꽤나 크니 울릴 때는 조금 살살 울려보는 게 어떨까 싶다. 

     

     

    오르골당을 내 손안에
    르타오를 내 손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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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카테이, 키타카로, 오타루 상점거리

     

     

    홋카이도는 설탕의 원료 중 하나인 사탕무가 재배되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오키나와에선 사탕수수가 재배되므로 냉온대에서 재배되는 사탕무와 열대지방에서 재배되는 사탕수수 모두를 재배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나라가 일본이다. 아무튼 홋카이도의 설탕은 특산물로 꽤 유명한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스위트(일본에서 단 맛의 디저트를 일컫는 말)가 상당히 발달해 있다. (물론 홋카이도가 유제품이 발달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앞서 방문했던 시로이코이비토도 그렇고, 공항에 가면 꼭 사 오는 로이스 초콜릿의 산지도 홋카이도다.

    오타루에는 유명한 곳이 세 곳이나 있는데 앞에 소개한 르타오 이외에도 롯카테이, 키타카로라는 디저트 전문점도 유명하다. 키타카로에서는 내 취향의 디저트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롯카테이에서는 제일 많이 팔리는 제품으로 "마루세이 버터샌드"를 추천하고 있어 맛이나 보고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중에 숙소에서 먹어본 바로는 너무 달았다는 것이 솔직한 평이다. 부드럽게 구운 쿠키 사이에 건포도가 박힌 버터크림이 들어있는데 약간 느끼하달까 싶은 데다 과하게 달았다. 그래서 귀국하던 날 신치토세공항 면세점에서 고민고민하다가 다른 선물과 함께 버터샌드 5개들이 한 상자를 더 사다 어머니께 드렸다. 드리면서 "엄청 달아서 맛없을 수도 있는데 맛이나 보시라고 사 왔다."라고 주의를 드렸다. 나중에 어머니가 이모에게 두 개를 드렸고, 그것을 이모와 이모부가 하나씩 나누어 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세분 다 너무 맛있었다고(빈 말씀은 절대 아니었다.)하셔서 취향이 이렇게까지 갈릴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먹어보라고 줬던 다른 사람은 나와 똑같은 반응이었으니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인터넷에서 사전조사를 하면서 인생 디저트라고 하는 분들도 많이 계셨어서 내가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 수도 있고, 나는 상온에서 먹었는데 어머니는 냉장하여 드셨다고 해서 보관방법의 차이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엇이 되었든 직접 먹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최고다. 남의 이야기만 듣고 사거나 사지 않거나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타루에서 만난 공연

     

     

    오타루의 상점거리를 한참 구경하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다시 운하가 나왔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있어 무슨 일인가 가보니 합창단 같은 분들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메인 가수가 한 분 따로 있고 뒤에는 코러스를 선 모양새였는데 노래가 상당히 프로페셔널했다. 왠지 때 이른 크리스마스 노래같이 들려서 교회에서 나오신 분들이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총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대대적인 행사를 하는 모습은 잘 본 적이 없다. 특히나 크리스마스가 2달이나 남은 이 시점엔 더더욱 그렇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연이었고 무슨 노랜지도 알지 못했지만 시원한 가창력에 한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타루운하 야경

     

    오타루운하 창고 야경
    오타루운하 야경

     

     

    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것 같아서 중간에 먼저 이동했다. 운하의 한쪽으로 난 산책로를 천천히 따라 걸으면서 잔잔하게 흐르는 운하를 구경하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예전에는 가스등만 켜두어서 은은하고 따스한 느낌이 돌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파란색 LED가 추가로 설치되어 상당히 인공적인 느낌이 난다. 화려함은 더해졌지만 로맨틱함이 부족해졌달까. 과한 것과 모자란 것은 모두 좋지 않다고 하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산책로 반대편의 옛 창고건물들에는 음식점이나 술집들이 들어섰는데 이따금씩 난 창문으로 보이는 내부 모습이 따스하고 아늑해 보였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음이 나와 같았을까...) 이 또한 바깥의 파란색 LED 덕분에 추운 기분이 들어서 상대적으로 밝은 백열등 조명을 설치한 실내가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닐까 싶다. 붉은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벽면이 그 운치를 더했다. 다만 산책로에는 삼삼오오 커플과 가족단위 여행객이 가득이라 혼자 다니는 나의 설 곳이 참 마땅치 않았다.

     

    오타루역 장노출

     

     

    처음 오타루역에 도착해서 곧장 걸어 만났던 오타루운하의 다리에 도착했다. 아직도 사람들이 그 다리에서 오타루운하의 야경을 촬영하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오타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오타루역까지 도로가 쭉 뻗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고생고생하며 들고 다닌 삼각대를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리개를 바짝 조이고 셔터스피드를 길게 잡아 장노출 사진을 찍으니 가로등과 신호등이 예쁜 빛 갈라짐을 보여주었고 오르내리는 차량들이 도로에 궤적을 그려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요놈은 뭐 하는 놈인가"하는 표정으로 흘끗거리며 지나갔지만,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기 위해선 그런 시선쯤은 견뎌내야 한다. 최후의 체력까지 장렬하게 불사 지른 나는 오타루역까지 간신히 기어올라가 도착한 열차에 곧바로 몸을 실었다. 좀 더 넉넉하게 쉬고 싶었는데 야속한 열차는 30분 만에 나를 삿포로역에 내려주었다. 

     

     

    미소노에서 삿포로 생맥주 한잔
    미소노 No.2 라멘

     

     

    아침부터 일정에 쫓겨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나는 저녁이라도 본격적으로 먹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삿포로역의 상가인 에스타 10층에는 "라면공화국"이라는 라멘 집합소가 있다. 8개의 매장이 한 곳에 모여 레트로한 테마로 꾸며놓은 곳으로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신치토세 공항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라멘 도장"이라는 라멘가게들이 운영되고 있고, 예전에 갔던 후쿠오카에 "라멘 스타디움"이라는 곳도 있었어서 나름 일본의 전통 있는 영업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튜브 어디에선가 추천한 가게가 있었는데 기억에서 깔끔하게 지워져 있던 관계로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구석진 가게에 들어갔다. 하지만 8개 가게는 모두 인기가 있었던 관계로 구석진 곳에도 사람은 많았다. 내가 들어간 곳은 "미소노"라는 곳이었는데 계란이 한알 다 들어가고 토핑이 푸짐한 것이 특징이었다. 생맥주 한 잔을 시켜 먼저 들이키고 있자니 따끈따끈한 라멘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반숙 계란이 반 갈라 동동 떠있었고 고기와 목이버섯, 파가 듬뿍 올려져 있었다. 다른 재료는 사실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저 기억나는 것은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다. 생맥주도 맛있는데 라멘국물도 맛있어서 물배가 차올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전투적으로 먹어치우고 밖으로 나오니 배가 출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물배라서 그래도 금방 소화가 될 거라며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완전히 파김치가 된 나는 샤워를 하고 들어와 또 기절하듯 잠들었다. 여행지에서 자꾸 기절하는 걸 보면 확실히 나도 체력이 많이 죽기는 했구나 싶었다. 9박 10일로 돌아다녀도 기절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지나는 시간 먹어가는 나이를 실감하게 하는 게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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