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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3)
    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23. 5. 14. 17:31

    3일차 여행계획

     

     

    홋카이도 3일 차 계획은 비에이였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이고, 그 큰 기대를 더더욱 충족시켜 주었던 곳이다. 사실 이곳에 가는 방법을 두고 상당히 고민이 깊었다. 뚜벅이가 비에이를 여행하는 방법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버스 or 택시투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버스투어는 6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거리를 생각해 보면 저렴한 편이고 삿포로에서 출도착을 해서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패키지로 묶여 다녀야 하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야 하고 마음에 드는 여행지에 더 머물거나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택시투어는 2시간에 12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 가격이 만만치 않고 비에이역까지 이동을 따로 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지만 원하는 장소에 접근성이 좋고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두 가지 방법 모두 내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여행에선 좀 벗어나있었던 데다 교통비는 비행기값과 JR티켓만으로 이미 너무 많이 썼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방법 모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비에이까지 JR로 이동한 뒤 버스와 자전거를 이용해 여행을 하기로 계획했다. 다만 자전거 대여소가 비수기에도 운영이 되는지 여부를 알 수 없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도 전화 걸기가 무서운 나는 일본에서도 전화를 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삿포로에서 JR로 비에이역에 가기 위해선 아사히카와 역을 경유해야 했다. 아침 6시35분에 출발하는 열차가 가장 이른 기차여서 다섯 시반쯤 일어나 샤워를 하고 곧바로 나왔다. 또다시 삿포로역까지 긴 행군의 시간을 가지면서 더 이상 이 도시가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 3일째 이 거리를 똑같이 왕복하고 있지 않은가. 3일이란 시간은 삿포로를 동네 마실처럼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시계탑이니 TV타워니 하는 곳들을 지나쳐 삿포로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익숙하기 그지없는 JR티켓 판매소에서 지정석을 예약해 티켓을 받았다. (삿포로에서의 생활이 진짜 삶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에이행 열차는 지정석이 없어 예약이 안된다고 하여 조금 아쉬웠다. 지정석 무제한인 홋카이도 JR티켓이 왠지 제값을 하지 못해 보였달까. 비싸게 샀으니 비싼 값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사히카와행 열차는 삿포로에서 북쪽방향으로 달렸다. 그 말인 즉슨 오른쪽 창가는 동쪽이므로 일출을 직방으로 얻어맞는 곳이라는 소리다. 우리나라보다 동쪽에 있는 홋카이도이기 때문에 해가 더 일찍 뜬다는 사실도 더해서 나는 아침부터 부족한 광합성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사실 가을 홋카이도의 기차는 전체적으로 더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지정석 열차칸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왼쪽 창가자리로 옮겨 앉을까 생각도 했지만 나중에 타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리 하지도 못했다. 물론 아사히카와에 도착할 때까지 추가로 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원칙주의의 나라에선 원칙을 따라주는 게 맞다. 

     

    아사히카와행 열차 오른쪽 창가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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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카와 역

     

     

    아사히카와에 도착해서 비에이행 열차를 타기까지 시간이 약간 남아서 역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사히카와역이 생각보다 되게 큰 것이 놀라웠다. 사실 홋카이도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인구 33만짜리 작은 도시일 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작은 지방도시에 서울역같은 으리으리한 역사가 있는 셈이다. 왜일까 생각해 보다가 아사히카와 동물원에 생각이 닿았다. 일본에서 세 번째로 방문객이 많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동물원이다. 나는 사실 홋카이도에 올 생각을 하기 십수 년도 더 전에 이 동물원의 존재를 알았는데 바로 가챠 덕분이다. 당시에는 "행동전시"로 유명한 일본의 동물원이라고 소개하면서 나온 가챠였는데 나는 그저 물개가 귀여워서 샀던 기억이다. 다른 동물원들이 우리 안에 갇힌 동물을 보여주는데 그치고 있다면 아사히카와 동물원은 동물의 습성을 분석하여 특유의 행동패턴을 보여준다는데 그 유명세가 있다. 예를 들어 무리 지어 걸어 다니는 펭귄의 습성을 이용하여 관객들 사이로 행진을 한다던가, 얼음구멍 사이로 헤엄치고 호기심이 많은 물범의 습성을 이용하여 물이 들어찬 유리통로를 기둥처럼 두어 사람도 물범을 구경하고 물범도 사람을 구경할 수 있게 해 두었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덕분에 무력하게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물들이 아닌 활발한 상태의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 300만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동물원이 된 듯하다. 동물원을 방문할 만큼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언젠가부터 동물원의 동물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왈칵 드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이번에는 여행지에서 제외해 두었다. 

    역 밖에는 가을이 잔뜩 내려앉은 개천이 멋들어지게 흐르고 있었다. 대자연의 향기가 솔솔 나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나무 한 그루 보기 쉽지 않은 대도시에서의 삶은 이런 물 풍성한 개천 하나만으로도 대자연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다. 사진을 좀 찍고 돌아다니다가 역으로 들어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오후의홍차를 사서 아침식사로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열차에 올라탔다. (한국에선 3천 원 정도 하니까 일본에서 먹으면 먹을 때마다 천 원 이상 버는 기분?)

     

     

    샌드위치와 오후의홍차
    비에이행 한량 열차

     

     

    전날에 이어 다시 한 량짜리 열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어제와 다른 점이라면 깊은 산 속 오솔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너른 들판을 달렸다는 것이었다. 여름 한 철 농사가 끝나서인지 갈아엎은 밭들이 줄을 이어 보였다. 아마도 여름에는 푸릇푸릇하거나 오색 찬란한 무언가가 뒤덮고 있었을 것이다. 수확이 끝난 밭에 작물들이 남아있으면 땅의 영양소가 헛되이 소비되기 때문에 곧바로 갈아엎는데 이렇게 흙과 섞인 식물 잔여물들은 비료의 역할까지 하게 된다. 비옥한 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사진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검은색 흙밭의 모습에서 홋카이도의 튼실한 작물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달려 비에이역에 도착했을 때 같이 내리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둘이었다. 그 한 사람마저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는 홀로 역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초 유명 관광지의 비수기 풍경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관광안내센터로 직행했다. 

     

     

    비에이역 근처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시로가네 온천까지 가는 버스 시간표였다. 버스를 타는 위치까지 확인하고 밖으로 나와 눈에 들어온 버스정류장 표지판을 향해 걸어갔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서 시간을 잘 맞춰 탑승해야했다. 이런 곳에선 버스를 한 번 놓치면 한두 시간은 기본으로 날려버리게 되는지라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커다란 실수를 두 번에 걸쳐 연속으로 해버렸다. 하나는 시내버스시간표가 적혀있다고 생각했던 버스정류장이 스쿨버스 정류장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관광안내소에서 건네준 버스 시간표와 너무 차이가 심하다고 했는데, 시간표형태의 무언가에 홀려버린 바람에 스쿨버스 앞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정류소의 시간표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이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도 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가까스로 알아차린 덕분에 곧바로 제대로 된 버스정류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여기서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우측통행에 익숙한 한국인이라 아무 생각 없이 버스가 갈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의 정류장에 서버린 것이다. 일본은 좌측통행이기 때문에 가려는 방향이 있다면 한국과 달리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에 서야 했다. 이 정류장의 시간표도 관광안내소의 시간표와 5분 정도 달랐지만 그 정도는 실수였겠지라고 무심코 생각했는데 건너편에서 제시각에 맞춰 오는 버스를 보고 나니 내가 건너편에 서있다는 사실이 대뇌의 전두엽을 스쳐갔다. 잽싸게 길을 건너 버스정류장에 서니 먼저 기다리시던 어르신이 "이 멍청이는 뭐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시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안 그러셨겠지만 내 마음속 창피함이 그렇게 느껴지게 한 것 같다. 차가 많은 동네였다면 시간에 맞춰 건너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스쿠-루 바스
    시로가네 폭포

     

     

     

    버스를 타고 시로가네 온천에 도착하니 사람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기도 했고 버스투어가 도착하기 전이라서 그랬나 싶기도 했다. 멋진 관광지를 혼자서 보는 것 만큼 짜릿한 경험은 잘 없다. 아주 오래전 불국사를 찾았던 때가 생각났다. 렌탈한 스쿠터를 타고 새벽에 도착한 불국사엔 관광객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 전날 내린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는데 스님 한 분께서 천천히 싸리비로 길을 쓸며 걸어가고 계셨다. 당시엔 좋은 카메라가 없어 그 장면을 담을 수 없었지만 인생에서 두고두고 그 장면을 떠올릴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일찍 여행을 다니면 그런 장면을 종종 만날 수 있어서 부지런을 떨곤 하는데 이날 오랜만에 그런 고요한 풍경을 다시 마주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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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카치다케와 흰수염폭포

     

     

    비에이지역은 꽤나 오래전부터 온천이 발견되어 운영되던 곳이다. 특히 도카치다케를 비롯한 2천미터 전후의 산들이 연속해서 솟아있는 도카치다케연봉은 그 자체로도 이미 장관이지만 활화산이기 때문에 분화구에서 나는 증기까지 더해져 엄청난 풍광을 자랑한다. 과거에 두 곳의 온천이 이 산자락 아래 위치하고 있었는데 1926년의 대분화로 진흙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두 마을을 덮쳐 많은 사상자를 냈고 동시에 온천이 매몰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다 1950에 온천이 새로 발견되자 당시 촌장이 "진흙에서 귀중한 플래티나(백금)가 발견된 것 같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하여 시로가네(白金) 온천이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멋들어진 리조트와 여관이 들어서있지만 내게는 아직 부담스러운 가격이라서 이곳에서 하루를 묵을 순 없었다. 하지만 멋들어진 풍경을 마주하고 보니 언젠가는 꼭 다시 돌아와 하루를 묵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언젠가는이 이뤄지는 건 도대체 언제인가...)

    리조트들이 있는 윗방향이 아닌 그 옆의 협곡쪽으로 걷다 보면 철제 다리가 하나 나타나는데 이곳을 내가 찾은 목적이 있다. 다리가 뭐 대단하다고 이것을 보러 왔냐 싶지만 진짜는 이 다리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다. 비에이라고 하면 반드시 찾아봐야 할 장소인 "흰수염폭포"가 바로 이 다리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화산지형의 특성상 비가 오거나 눈이 녹은 물이 지표면을 따라 흐르지 않고 지면에 우선 흡수된다. 산 사이사이에 갈라진 틈을 따라 지하수를 형성해서 따라 내려오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바깥으로 향한 틈새로 흘러나오게 된다. 제주도에서는 용천이라고 해서 수원지 없이 갑자기 해변에서 개천이 나타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실 주변에 물이 나올 만한 곳이 없는데 갑자기 나타나게 되는 물줄기라서 그 자체로도 신기한데, 낙차까지 있어버리면 이건 반칙이다. 협곡을 지나는 다리에서 보면 아무것도 없던 벽면에서 갑자기 폭포가 생겨나있다. 작은 물줄기가 여러 차례 갈라지면서 하얀 물거품의 궤적을 남기고 그것이 벽면을 가득 채워 마치 하얀 수염이 가닥가닥 떨어지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시로가네(흰 수염) 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무도 없는 그 철제다리에서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그 풍경을 눈에, 카메라에, 가슴에 담았다.

     

    도카치다케 사방정보센터 가는 길의 퀴즈 - 일본엔 화산이 전부 몇개일까요? 정답은 76계단 더 올라가세요. (답은 2번)

     

    끝없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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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카치다케 화산 사방 정보센터

     

     

    흰수염폭포를 한참 구경하고 난 뒤에 다리 건너편의 터널이 궁금해졌다. 산 쪽 방향으로 구불구불 올라가는 계단을 터널로 만들어놓은 형태였는데 위에 무엇이 있다고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관광지 바로 옆에 이렇게 본격적인 시설이 있다는 것은 위에 볼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닿아서 무작정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중간중간에 벌레 시체들이 놓여있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혼자 여행은 호젓하기도 하지만 가끔 무섭기도 하다.) 계단수는 286개로 생각보다 많았는데 중간중간 쉼터의 벽에 퀴즈가 붙어있고 그 답이 다음번 쉼터에 있어서 잠시 숨도 돌릴 겸 생각도 하게 되었다. 동시에 나 자신이 조금 뿌듯해졌다. '이제 이 정도 일본어는 읽어지기도 하는군' 하면서 말이다. 

    숨이 턱을 지나 혓바닥쯤 차올랐을 때 계단의 끝이 보였다. 순간 자물쇠가 보여 문이 닫혀있나 싶었다. '이럴 거면 입구부터 막았어야지!'하고 화가 날뻔했는데 다행히 조금 뻑뻑하게 닫혀있었을 뿐 문이 열렸다. 산 중턱에 잘 깎아놓은 넓은 풀밭과 함께 세련된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도카치다케 전망대라고 생각하고 입구를 기웃거리자 안내하시는 아주머니께서 나오셨다. 슬리퍼로 갈아신으라고 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 영상을 보겠냐고 물어보신 것 같은데 내가 괜찮다고 해버렸던 것 같다. 안내하시는 분이 크게 당황하시는 게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이 건물의 정체는 "도카치다케화산 사방정보센터"였다. 아직도 열심히 분화 중인 도카치다케에선 앞선 대분화에 따른 진흙사태로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던 적이 있다. 때문에 화산을 항상 감시하고 흘러내리는 진흙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했다. 그중 하나가 사방댐이다. 쏟아져 나오는 진흙이나 모래를 막기 위해 가운데가 뚫려있는 댐을 지은 것이다. 가운데가 뚫려있는 이유는 전부 막아놓으면 쌓이다 넘쳐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진흙과 함께 쏟아져내려 온 돌무더기나 나뭇가지 등이 그물 같은 역할을 하여 큰 덩어리들을 걸러주고, 진흙은 그 사이로 속도를 잃은 채 빠져나와 다음 사방댐에서 또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화산쇄설류는 힘을 잃고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주거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역할을 총괄 감독하는 곳이 사방정보센터이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제공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방정보센터의 역할에 대한 영상이었는데 내가 괜찮다고 해버렸으니 안내인분의 당황이 이해가 간다. 영어가 되셨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관광 목적의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설픈 일본어와 손짓발짓으로 영상실에 들어가 영상을 관람했다. 널찍한 시청실을 혼자 전세내고 보고 있자니 VIP가 된 느낌이었다.(나 특별대우 좋아하네.) 다행히 한글자막 영상이 준비되어 있어서 크게 공부가 되었다. 도카치다케의 형성과정과 발생했던 화산폭발, 그에 따른 사방센터의 건립까지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였다. 

     

     

    사방정보센터 윗길
    내려가는 길

     

    청의호수 가는 길

     

     

    다시 계단을 내려와보니 어느새 관광객이 많아져있었다. 일찍 와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다음 행선지인 청의호수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비에이는 유명한 관광지이긴 하지만 대중교통은 촘촘하게 운영되는 편은 아니다. 흰수염폭포나 청의호수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간격이 2시간 이상인 경우가 많았고 그 반대편(각종 이름 붙은 나무들을 구경할 수 있는)으로 가는 대중교통은 아예 없었다. 흰수염폭포에서 청의호수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걸어가 보기로 했다. 구글지도에서 약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고 했으니 내 느린 걸음으로는 50분 정도 걸릴 터였다.

    청의호수로 가는 길에 인도가 생각보다 정비가 잘 되어있었다. 외진 곳에는 인도가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니세코라던가 니세코라던가...) 이곳은 처음부터 끝가지 인도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주변에 숲은 울창하고 하늘은 푸릇푸릇해서 걷는 느낌이 좋았다. 이따금씩 낙엽이 쌓인 곳을 지나가면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또 좋았다.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아서 정말 한가로이 평탄한 산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스머프의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랄랄랄랄랄라 랄라랄랄라~ 그 표지판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곰에 주의하십시오

     

     

    곰을 주의하라는 푯말이 있었다. R元年은 일본의 연호인 레이와를 의미하는 것일 테니 그 원년인 2019년에 곰이 발견되었던 모양이다. 홋카이도지역은 야생곰이 서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불과 2년 전에 삿포로시내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친 사례도 있다. 마침 나는 유튜브에서 홋카이도를 검색하던 중 알고리즘의 마법으로 곰 사건에 대한 영상을 여러 편 보게 되었다. 100여 년 전에 사람을 해친 곰 이야기도 있었지만 2016년에 발생한 사건도 있었다. 북극곰을 코카콜라로, 곰을 곰돌이 푸로 배운 나에게 그동안의 곰은 귀염둥이 곰돌이들이었지만 현실의 곰은 재앙 그 자체였다. 곰이 상당히 집요하고 새끼를 건드리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는 것도 영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저 표지판은 나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여럿이 다니면 곰이 알아서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나는 나 홀로 여행객인 데다 키도 작아서 위압감도 없지 않은가. 그때부터였다. 푸르던 하늘이 시퍼렇게 보이고, 낙엽 밟는 소리가 곰발자국 소리로 들려 놀라게 되고, 차가 많이 지나다니지 않아 고즈넉하던 그 길이 도움을 요청할 사람 하나 없는 스산한 길이 된 것은. 예전에 봐둔 영상에서 곰이 종소리를 무서워한다고 해서 현지인들은 가방에 종을 매달고 다닌다고 했다. 갑자기 없는 종을 만들어낼 순 없는 법이니 유튜브에서 급하게 종소리라도 찾아 재생해 놓을까 했는데 어디서 범종소리만 잔뜩 나와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나의 하산길은 저 푯말을 보기 전과 후로 나뉜다. 쥬라기공원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랩터를 피해 도망 다니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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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금부동의 폭포
    백금부동의 폭포

     

     

    그렇게 벌벌 떨며 길을 내려가는데 "백금부동의 폭포" 표지판이 보였다. 사실 이 길을 걸으려고 생각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흰수염폭포와 청의호수 사이에 폭포가 하나 있어 기회가 닿으면 구경해 볼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찾아봐도 정보가 많지 않아서 막상 근처에 가면 길도 없을지도 몰라 가능성으로만 열어두었던 곳인데 표지판을 보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문제는 내가 곰 주의 표지판을 보고 난 뒤였다는 점이다. 백금부동의 폭포는 차도 옆으로 슬쩍 난 샛길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데 숲이 우거지고 땅이 질척거렸다. 뭔가 본격적인 숲이 시작되는 분위기인데 참 곰이 살기 좋은 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폭포면 물가인데 물 마시러 곰이 오지 않겠어?) 하필이면 덤불이 우거진 곳이 시컴튀튀하게 곰가죽같이 생겨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래도 아주 조금씩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어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았다. 경계하는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폭포는 경이로웠다. 낙차가 크다기보다는 계단처럼 되어있는 물길을 따라 흰 거품을 내며 쏟아져내리는 형상이었다. 그 아래로 철철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까지 자연스러웠다. 그 옆으로는 작은 제단이 있어서 지장보살(일본에선 부모보다 일찍 죽은 아이를 구원하는 역할로 알려져 있다.)이 있었다. 마침 골짜기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후광처럼 느껴져서 신비로웠다. 사람이 온 흔적은 있는데 자주 온 흔적은 아니었어서 여전히 곰은 무서웠다. 

     

     

    청의 호수 주차장

     

     

    그렇게 한참을 바들바들 떨며 걸어오던 내 눈앞에 나타난 주차장은 마치 구세주같았다. 이곳에는 사람도 많고, 여기서 내려갈 때는 버스를 탈 것이라서 이제 더 이상 곰은 무섭지 않았다. 역시 곰은 무서운 생물이 아니라 귀여운 생물이지. (직접 마주하게 되지 않는 이상은) 공기마저 안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이 만든 잘 정비된 주차장이 주는 안정감이란. 

    청의호수(아오이이케)는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는 호수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풍경에서 오히려 대자연의 다양함을 느끼게 되는 독특한 장소다. 흰수염폭포(와 그 상류)부터 내려온 온천수에 수산화알루미늄이 들어있는데 이것이 콜로이드화되어 입자적 특성을 띠게 되고 그 결과물로 순수한 물과는 다른 발색을 만들어낸다. 기온, 습도, 구름의 양, 계절 등의 영향을 받아 색이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청의호수를 찾는 사람들마다 보았다는 색과 느낌이 다르다. 다만 한겨울에는 호수가 땡땡 얼어서 푸른빛을 볼 수 없다고 하니 그건 조금 아쉬울 것 같다. 애플 매킨토시의 배경화면으로 켄트 시라이시 작가의 청의호수 사진이 사용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그 사진엔 호수는 얼지 않은 채 나무만 눈으로 덮여있었다. 시기를 잘 맞춰 가면 겨울풍경이면서도 푸른 호수를 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청의호수를 구성하는 물은 자연에서 유래한 것이 맞지만 호수 자체가 원래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88년 진흙 분화로 피해가 발생하자 이듬해인 1989년 콘크리트로 사방댐을 만들었고 물의 일부가 옆으로 흘러 호수를 구성하게 된 것이 청의호수다.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지만 완전 자연발생은 아닌 셈이다. 갑작스레 흘러들어온 물에 곧게 자라 있던 나무들이 고사했고 나목이 되어 호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이 또 묘한 느낌을 준다. 배경으로는 빽빽한 숲과 하얀 설산이 자리 잡고 있어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가을의 청의호수는 주황색 단풍 가득한 숲을 배경으로 삼고 있어 눈이 참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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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의호수 - 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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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의 호수 세로 + 청의호수를 만든 사방댐

     

     

    청의호수에서도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여유롭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비수기 특수를 톡톡히 누리는 기분이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어서 청의 호수 주변을 돌아다녔다. 단풍이 가득한 삼림은 그 자체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쭉 뻗은 도로와 함께 사진에 담으니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버스정류장이 하도 단출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잠시 뒤에 보니 예닐곱 명 정도가 줄을 서있었다. 버스를 타는 곳이 확실해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도카치다케의 정상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쪽으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었다. 나에게 활화산은 아무리 보아도 신기한 존재였다.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에 타서 다시 비에이역쪽으로 향했지만 비에이역 조금 전에 내렸다. 비에이초리쓰뵤인마에(비에이정립병원 앞) 정류장에서 내리면 이 지역의 유명한 맛집인 준페이가 있다. 작은 마을에 줄을 서서 먹는 맛집이라고 찾아본 블로그며 유튜브마다 칭송이 자자했다. 예약이 없으면 먹기 어려운 경우도 태반이라고 했다. 나는 예약 없이 방문했는데 대기가 많으면 기다려볼 생각이었고,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면 다른 곳에서 대충 때우자는 생각이었다. 나 혼자 여행은 밥을 먹는 부분에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발생한다. 개인석을 마련해 둔 음식점에서는 빈자리가 곧바로 나거나 하면서 2인 이상 테이블 손님보다 빠른 식사가 가능한 경우가 제법 많다. 물론 1인 식사를 받지 않는 음식점도 있어 그런 점에선 불리하다. 그래도 일본이라는 특성상 후자는 많지 않다. 준페이에는 개인석이 있었는 데다 그날 손님이 많지 않아서 들어가자마자 바로 착석하고 주문을 넣었다. 새우튀김덮밥이 유명한데 새우 옵션에 3마리와 4마리가 있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3마리를 먹고 아쉬울 수 없어서 4마리를 주문했다. 삼총사는 부족하기 때문에 달타냥을 포함해 넷이라는 완성형 숫자를 만들지 않았던가. 4는 아름다운 숫자다. (우리나라는 4층을 F로 표시하긴 하지만...) 다다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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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페이 새우튀김덮밥

     

     

    새우가 살이 튼실한 것이 먹는 맛이 있었다. 유자소스가 들어간 샐러드와 미소장국, 그리고 겨자소스를 두른 듯 한 매실장아찌로 구성된 식사가 1만5천원 정도였는데  그 정도는 받아야 할 것 같은 새우 퀄리티였다. 사람들이 모두 소스 이야기를 했는데 적당히 단짠단짠 한 것이 입맛에 딱이었다. 양도 넉넉해서 다 먹고 난 뒤에 배가 제법 불렀다. 후식으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시키니 콘 스탠드에 꽂혀서 나왔다. 특히 콘 부분이 바삭한 와플형태로 구워져 있어서 재미난 맛이었다. 소프트아이스크림까지 먹으니 배에 더 이상 무언가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어떤 블로그에서 보길 준페이에 김연아가 다녀갔다고 했다. 사인이 걸려있다고 해서 두리번거렸는데 카운터 근처에서도 발견할 수 없어 점원분께 혹시 유나킴의 사인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처음에 잠시 못알아들으시는 듯하다가 곧바로 이해하시고 카운터 왼쪽의 벽으로 데려가주셨다. 거기에 김연아의 사인이 있었다. 수많은 유명인들(그러나 나는 누군지 모르는)의 사인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사인. 그리고 일본인 점원이 바로 이해하고 데려다주실 수 있는 그 인지도. 국뽕이 슬쩍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음 일정을 위해 비에이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준페이 소프트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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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에이역 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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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에이역 앞 풍경

     

     

    처음에 계획을 세우면서 비에이 역사를 기준으로 뒤편(서북쪽)은 자전거를 대여해서 돌아다녀보자고 마음먹었다. 원래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사방이 오픈된 탈것에 최적화된 곳이 비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비수기라 렌탈이 가능할지 긴가민가 했는데 마침 역 바로 앞의 편의점을 운영하는 곳에서 자전거 렌탈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언덕이 많은 곳이라 그냥 자전거로는 조금 힘에 부칠 것 같았는데 마침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가 있어서 그것을 빌리기로 했다. 시간당 600엔이었고 2시간을 렌탈했다. 선금을 내고 여권이라도 맡겨야 하나 쭈뼛대고 있는데 그냥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시란다. 아니 외지에서 온 사람을 뭘 믿고 이리 자전거를 빌려주는 걸까? 살면서 누굴 속이려 한 적은 없지만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게 어려운 세상이기도 한데, 흔쾌한 믿음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일반 자전거나 킥보드, 스쿠터같은 것은 타봤지만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는 처음이었다. 사실 빌리면서 킥보드 같은 완전 전동 시스템을 생각했는지라 배터리를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2시간이나 탈 수 있는 킥보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껏 배터리와 모터가 달려 무거운 전동 자전거를 빌렸는데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그건 그냥 무거운 자전거일 뿐이니까. 근데 주인장이 배터리 떨어질 일 없으니 편하게 타시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는 완충 시 대여섯 시간은 너끈하게 주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2시간 빌려놓고 배터리를 걱정하니 기우였을 수밖에.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는 먼저 전원을 올리고 페달을 밟아야 비로소 모터가 작동하여 힘을 추가로 실어주는 방식이었다. 내가 밟지 않으면 모터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평지에서 속도가 많이 나오게는 하기 힘들지만 언덕길에서는 확실하게 힘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언덕을 평지처럼 달릴 수 있어졌다랄까? 이것은 마치 세발자전거를 탈 때 뒤에서 아버지가 밀어주시는 그런 기분이었다. 자전거 하나에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한쪽 귀에만 꽂고(양쪽 다 꽂으면 주변 소리를 못 듣는 위험이 있어서) 구글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여 제부루의 언덕을 향해 달렸다. 

    비에이 들판으로 가기 직전에 산업도로를 한번 건너야 했는데 커다란 트럭이 쌩쌩 달려서 건널 타이밍을 쉽게 잡을 수 없었다. 여행에서 모험도 좋지만 안전이 가장 최우선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좌우를 살펴 한 순간 빠르게 건넜다. 이후로는 이렇게 차와 맞짱뜰 일은 없었고 오가며 딱 한 번씩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길을 건너 제루부의 언덕에 도착했을 때 놀랍게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비수기라지만 이 정도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없었다. 건물이고 들판이고 주차장이고 텅텅 비어있었다. 자전거를 주차장에 대놓으면서 약간 멋쩍은 기분이었지만 자리차지한다고 누가 뭐라 할 이유도 사람도 없었다.

    제루부의 언덕은 여름철에 갖가지 꽃을 동일한 폭으로 길게 심어 마치 무지개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입장료가 없는데 꽃밭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너무 궁금했다. 꽃을 수확하여 향수회사에 원료로 납품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장소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카트를 유료대여하니까 거기서 수입이 나는 걸까?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데 거기서 나온 수입으로? 그런 궁금증을 가득 안고 방문했지만 역시나 답을 찾을 순 없었다. 사람이 있으면 물어볼까 싶었는데 코빼기도 볼 수 없었으니까. 내가 방문했을 땐 꽃은 대부분 정리가 되어 있어 흑갈색 토양이 너른 땅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광활함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곳이었다. 멀리 설산과 단풍들을 조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루부는 참 좋은 곳이었다. 제루부는 카'제'(바람), 카오'루'(냄새), 아소'부'(놀다)의 뒷글자를 모은 것으로 '상쾌한 바람 향기가 있는 언덕에서 모두 즐겁게 놀기'를 캐치프레이즈로 하고 있었다. 꽃이 없어 냄새는 없었지만 제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꾸 제부루 언덕이라고 기억했는데 유래를 조사하고 난 뒤부터는 똑바로 읽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도 제부루 언덕이라고 치면 제루부언덕을 다룬 글이 많다.)

    참고로 제루부의 언덕 홈페이지에서는 24시간 작동하는 카메라 영상을 제공하고 있어 현재 상황이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셔도 좋을 것 같다. 

    http://zelb.plala.jp/viewer/live/index.html?lang=ja 

     

    VB Viewer -

     

    zelb.plala.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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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루부의 언덕

     

     

    다음 목적지로는 '켄과 메리의 나무'가 가장 가까워서 그곳을 설정하고 다시 자전거를 달렸다. 내 생각에 비에이에서 이런 나무들을 찾아가서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나무를 찾아가는 과정의 풍경이 너무나 좋았다. 비에이까지 올 수 있는 분이라면(+겨울이라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버스나 택시투어를 이용하기보다는 자전거를 렌탈해보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바람과 하늘과 들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라는 생각이다. 

    켄과 메리의 나무는 닛산 스카이라인 자동차의 광고에 등장한 사시나무다. 평평한 들판에 유난히 홀로 솟구친 자태가 광고인이 보기에 매력적이었던 듯하다. 그 광고에 등장한 두 주인공이 켄과 메리였는데 이 나무가 그 이름을 물려받은 셈이다. 광고가 제작된 것이 1970년대이니까 나무의 나이는 최소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도 놀랍지만 50년 전의 광고 덕분에 아직까지도 관광지로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놀랐다. 별 것 아닌 것에도 이야기가 녹아들어 가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의 여러 관광지에서 느끼곤 한다. 이야기는 실제로 풍경 자체에서 받는 느낌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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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목적지로 세븐스타나무를 설정하고 이동하는 중에 풀밭에서 귀 끝이 까맣고 꼬리가 복슬복슬한 생명체와 조우했다. 순간 강아지인가 싶었다가 목줄이 없어 야생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자전거를 세우고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내며 조심스레 살펴보니 야생의 여우였다. 난생처음 본 야생의 여우라 나에게 달려오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나에겐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가 있었으므로 언제든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호기심이 훨씬 컸다. 급한 마음에 우선 셔터를 눌렀는데 여우가 아니라 앞에 있던 풀떼기에 초점이 잡혔다. 허둥대며 몇 번을 더 찍고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망원렌즈를 꺼내는 찰나 녀석이 나를 알아차렸다.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보더니 기다려달라는 나의 염원을 무시하고 냅다 반대쪽 수풀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높이가 있는 덤불을 껑충 넘어 사라졌다.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참 귀여운 생물이었다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봤더니 홋카이도에서 종종 목격되고는 하는 북방여우였다. 보통 눈 덮인 도로가에서 총총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곤 하는 듯했다. 사람들이 음식을 주거나 하는 경우도 있어서 가끔 사람을 따라오기도 한다는데 야생성을 무시해선 안되고 병원균을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으므로 만나더라도 멀리서 보기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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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방여우

     

     

    세븐스타 나무로 향하면서 혹시나 여우를 한번 더 볼 수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에 수풀 쪽을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볼 수 없었다. 아예 못 보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 분들보다야 운이 좋았다 하겠지만 너무 감질나게 봤던지라 한번 제대로 보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세븐스타나무에 도착했다.

    언덕을 한참 올라 조금 땀이 날 즈음 세븐스타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1976년 세븐스타 담배의 패키지에 들어가면서 나무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광고나 패키지에 넣는 사진은 전문가들이 심사숙고 끝에 고른 멋진 장소일 것이므로 보통 이런 유래를 가진 곳의 풍경은 기본 이상 하는 것 같다. 사실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찾은 장소라서 처음엔 일렬로 쭉 늘어선 편백나무들을 세븐스타나무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그 옆에 큰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노을 지는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니 하트모양으로 보여서 '너는 아직 이름이 없는 듯 하니 내가 하트나무라고 명명하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세븐스타나무였다. 이름 없는 쪽은 편백나무 가로수들이었다. 사실 나무야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이름이 무엇이 중요할까. 이름이라는 것에 목을 매는 것은 인간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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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븐스타나무

     

    편백나무 가로수

     

     

    전에도 말했다시피 홋카이도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동쪽이다. 그래서 해가 빨리 뜨지만 그만큼 또 빨리 진다. 오후 4시를 좀 넘어가는 시점이었는데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보니 욕심이 나서 세 시간을 빌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2시간이 딱 적당했구나 싶었다. 좀 더 일찍 돌아다녔다면 더 넉넉하게 돌아봤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그래도 뚜벅이로 돌아다니면서 알차게 구경한 것 같아 뿌듯했다. 돌아다니면서는 언덕을 오르는 코스가 많았는데 비에이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내리막이 많아 페달 밟을 일도 없이 편안하게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감상했다. 도로에 차도 거의 없어서 위협이 되는 부분도 없었다. 그저 비에이의 경치를 즐기기만 하면 되어서 좋았다. 

     

     

    해가 지는 비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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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에이역으로 돌아가는 길

     

     

    비에이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밭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볼 수 있었다. 이곳 말고 어딘가에 홀로 우뚝 솟은 '크리스마스 나무'가 있는데 혹시 그것인가 하고 봤지만 그렇게 커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고된 아침 농사를 마친 뒤면 작은 그늘을 파라솔 삼아 새참을 할 수도 있고 잠시 등을 기대어 휴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곳이 비에이였다. (그리고 왠지 시력측정기에서 나올법한 이미지라는 생각도 계속 들었다.)

     

     

    노을

     

     

    비에이역에 돌아오니 점심께 출발했을 때 새파랗던 하늘과 산의 모습이 어느새 주황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겨우 2시간 사이에 아예 다른 풍경이 되어버린 도카치다케의 모습에 나는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30분 정도를 하염없이 산만 바라보았다. 조금씩 켜지는 가로등도 따스한 주황색 빛을 내어서 약간은 쌀쌀해지는 날씨에 온기를 주고 있었다. 이곳을 꼭 다시 찾아오고 싶다. 다른 어느 때도 아닌 가을에, 내가 보았던 바로 이 풍경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부모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 시기에 이곳을. 

     

     

    붉게 물든 도카치다케

     

     

    자전거를 렌탈샵에 반납하는데 주인장께서 여전히 쿨하셨다. 바깥에 자전거를 세우고 주인분께 키를 반납했는데 자전거의 고장이나 흠집 등을 체크하려는 액션이 없었다. 오히려 '자전거 반납했는데 왜 안 가니?' 하는 표정으로 보시는 기분이었다. 아마 상기된 내 표정에서 '이 녀석 여행이 꽤나 즐거웠나 보군. 자전거 때문에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찾을 수가 없어. 자전거엔 문제가 없나 보군.'이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때의 나는 몹시 신나 있었다. 홋카이도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비에이. 보통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라고 했는데 이곳은 기대보다 더 큰 감동이 있었다. 

     

     

    자전거 렌탈샵
    비에이역 좌측의 관광안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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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에이역 정면의 시계탑

     

     

    원래는 비에이에서 5시 넘어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귀가할 생각이었지만 앞의 일정들이 모두 일사천리로 흘러간 관계로 4시 30분쯤에 출발하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비에이에서 아사히카와로 가는 열차는 지정석이 없었기 때문에 소지한 JR패스를 보여드리기만 하면 되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오히려 좋았다. 

     

     

    비에이역 간판

     

    아사히카와 to 삿포로 - 특급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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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카와역에서 곧바로 삿포로로 돌아와 숙소를 향해 걷다가 조금 남은 체력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오사카에는 글리코상(한쪽 다리를 들고 만세를 하는 도톤보리의 유명 간판)이 랜드마크라면 삿포로에는 니카상(아사히계열 위스키회사 니카의 유명 간판)이 있다. 삿포로 최고의 번화가인 스스키노의 사거리에 자리하고 있어 삿포로를 찾은 사람들의 인증을 도맡아 하고 있다. 닛카위스키는 창립자가 스코틀랜드에서 배워온 스카치위스키 제조법을 이용하여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브랜드화 하는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중세 귀족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위스키 한 잔과 위스키의 주원료인 보리를 손에 들린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엔 약간 수줍어하는 듯한 손동작이 킬포인트인 듯하다.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가볍게 마시는 츄하이(소주에 탄산과 과즙을 섞은 것)는 좋아하는데 최근에 하이볼이 워낙 유행인지라 닛카에서 나온 하이볼 두 캔을 사서 한국으로 가져왔다.(하이볼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어느 기분 좋은 날 냉장고에 미리 넣어두고 식사에 반주로 곁들였는데(츄하이처럼 달달할 거라고 생각했다.) 도수도 높았고 뭔가 달달한 맛도 없고 나 무향 같은 것이 나서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남은 한 캔을 어딘가 치워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기분이 꿀꿀하던 날 도수 높은 술 한 잔이 땡겨서 눈 딱 감고 마신 두 번째 캔으로 하이볼의 맛을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 먹어서 눈이 뜨인 것일까, 아니면 기분 꿀꿀할 때 먹어야 맛있는 술인 것일까, 혹은 안주가 오징어라서 맛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술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스스키노 닛카상

     

     

    이날도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밤 열 시가 다 되어있었다. 여행일정이 벌써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4일 차는 하코다테로 넘어가는 일정이라 기대가 되었다. 다만 불안한 점이 하나 있었다. 두 개 챙긴 카메라 배터리 중 하나를 벌써 다 써버리고 오후동안 두 번째 배터리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처럼 셔터를 마구 눌러댄다면 5일 차 이전에 배터리가 다 떨어질 상황이었다. 충전기도 없는 상황이라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조금 아껴 쓰면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그것은 5일 차의 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5일차의 일정에서 이야기할 예정이다.) 기대와 불안이 함께하는 3일 차 여행의 밤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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