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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4)
    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23. 6. 11. 14:18

    4일차 계획표

     
     
    삿포로를 베이스캠프로 하는 일정이 1차적으로 끝나고 4일 차에는 하코다테로 이동하여 1박을 하기로 했다. 이미 한국에서 하코다테 숙소 1박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앞선 일정들과는 달리 변동이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비가 안 오기만을 간절하게 빌었는데 아침부터 날씨가 매우 꾸물꾸물거렸다.(테루테루보즈라도 매달아 놓을 걸 그랬다.) 일기예보에서도 오후에 비가 오다가 저녁쯤 그친다고 했다. 저녁에 하코다테야마 전망대에 올라가는 일정은 날씨가 흐리기만 해도 좋은 풍경을 보기 힘든데 낮동안에는 아예 비가 온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우선 원래 계획대로 오누마국정공원까지 가보기로 하고 도착한 후에 날씨를 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처음 잡았던 숙소와는 이제 마지막이었는데 번번이 새벽같이 길을 나서는 나는 맨날 텅 비고 고요한 로비만 보게 된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인사를 들어본 것이 언제적인지도 모르겠다. 
     
     

    텅 비고 고요한 로비

     
     
    한 동안 들고다니지 않아도 되었던 옷가지며 잡다한 짐을 모두 챙겨 나서다 보니 삿포로역까지 이동하는데 힘이 두배로 들었다. 출국할 때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캐리어 때문에 추가수화물 비용을 내는 게 싫어서 배낭에만 바리바리 쌓아서 왔는데 이럴 땐 슬슬 굴리면 되는 캐리어가 참 그립다. 오타루에서 산 간식이며 기념품 등으로 짐이 더 추가되었기 때문에 도무지 삿포로역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이날만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적은 돈으로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6시에 출발하는 하코다테행 열차는 JR패스로 지정석 예약이 가능했다. 오누마공원까지 지정석을 예약하면서 좌측 창가석을 달라고 부탁드렸다. 삿포로에서 하코다테로 가는 선로는 좌측으로 우치우라만을 끼고 달리기 때문에 바다를 보고 싶다면 좌측창가에 앉아서 가는 것이 좋다. 좌측 창가에 앉는다면 오누마공원 근처에선 고마가다케 산을 보기에도 좋다. 날씨가 좋다면 우측으로도 요테이산이나 우스산을 볼 수 있으니 사실 어느 쪽으로 앉아도 크게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아 조금 출출했었기에 전에 오타루에서 산 간식중에 포테이토 파이 하나를 꺼내먹었다. 한국에선 기차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이 민폐라는 분위기인데 의외로 일본에서는 도시락 기타 각종 먹거리를 먹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일본에서의 기차여행은 이동수단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그 자체로 여행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인 것은 아닐까 싶다. 여행지에서 음식을 먹는 것까지가 여행의 완성 아니겠는가. 
     

    하코다테 가는 길에 먹은 포테이토 파이 - 맛은 쏘쏘
    하코다테 가는 길 - 우치우라만 풍경
    하코다테 - 삿포로를 연결하는 호쿠토(북두) 특급열차

     

     

    오누마 국정공원에 도착할 즈음의 날씨는 본격적인 폭우였다. 오누마 국정공원의 관광은 산책로를 걷는 것이 중요한데 도무지 걸어 다닐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오는 날엔 물리적으로 고장이 나는(?!) 체질이라 장마철엔 절인 배추 같고 잠시 내리는 소나기에도 머리가 아파오는 타입이다. 여행지에서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조금 더 버텨보긴 하지만 그래도 진흙탕길을 걸어 다닐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 열차를 계속 타고 하코다테까지 가기로 했다. 도착해서도 너무 날씨가 안 좋으면 바로 숙소로 들어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마침 홋카이도 5박의 일정 중에 가장 고급진 숙소였기 때문에 여독을 풀기에도 좋았다. 지정석은 오누마 국정공원까지였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유석으로 칸을 옮겨 앉았다. 놀랍게도 자유석 쪽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꽉꽉 들어차있던 지정석보다 훨씬 쾌적했다. 사람이 많이 찾는 성수기엔 지정석이 반드시 필요할지도 모르겠으나 비수기엔 자유석을 활용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많이 내리는 비

     

     

    하코다테역에 도착했을 때에도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숙소로 바로 이동할까 했지만 그렇게 되면 놓치는 관광지가 너무 많은지라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고료카쿠 타워까지는 가보기로 했다. 우선 하코다테역 2층의 코인로커에 카메라를 제외한 짐을 모두 때려 넣었다. 뺄 물건을 모두 락커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는데 가방에 태블릿이 그대로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밖에서는 쓸 일이 없어서 700그람짜리를 쓸데없이 무겁게 들고 다니게 되는 셈이라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코인로커 문짝에 또 작은 문이 하나 달려있었다. 찬찬히 읽어보니 코인로커를 잠그는 키를 이용하여 작은 문을 횟수 제한 없이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코인로커들을 봤지만 넣어 둔 물건을 한두 개만 빼낼 수 있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하코다테에서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물건을 하나만 빼고 닫으려 해도 다시 돈을 넣어야만 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 수백 엔을 날로 먹는 날강도 같은 놈들이라며 저주(?!)했는데 하코다테의 코인로커 운영하시는 분께는 신의 은총이 내리시길 간절히 기원했다. 마침 태블릿을 대각선으로 눕히니 작은 문짝으로 쏙 들어갔다. 복 받으십시오. 두 번 세 번 받으십시오. 

     

     

    하코다테에 어서오세요
    하코다테 코인락커 운영자님께 신의 은총이 내리시길

     

     

    사실 내게 하코다테는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의  '이진칸 호텔 살인사건'으로 기억되던 곳이다. 호텔 주변은 눈쌓인 외딴 숲 속이고(탐정만화가 으레 그러하듯), 호텔을 경비하는 경찰로부터 초대받은 김전일은 하코다테라는 여행지에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내게 하코다테는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숲이 가득한 휴양지면서 일본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다. 만화로 현실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하코다테역에서 내리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잘 정리된 정갈한 역사,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골목골목들은 만화 속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특히 만화에서는 호텔 건물 외관을 하코다테 구 공회당 건물을 모티프로 그렸는데 이 또한 실제 건물에서는 그런 슬픈(?!)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애초에 만화에 너무 몰입이 심했던 것 같다.) 아 물론 일본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는 것은 여전히 맞았다. 

    비가 아직도 많이 내리는 관계로 고민을 하다 우선 하코다테 역 안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팜플렛이라도 몇 개 보면서 일정을 고민해 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에 Free Rent라고 쓰여있는 곳에 우산 하나가 꽂혀있는 것을 보았다. 안내하시는 분께 빌려가도 되는지 여쭤보니 흔쾌히 가져가라고 하셨다. 보증금이나 신분확인 절차도 없이 바로 우산을 빌려주는 모습에서 다시금 전날 비에이에서 자전거를 빌리던 때가 생각났다. 홋카이도는 날씨만큼이나 쿨한 도시인 것 같다. 

     

     

    하코다테 역전

     

     

     

    하코다테역에서 노면전차를 타고 고료카쿠 고엔마에역에서 하차했다. 잠시 방향을 잃고 헤맸지만 멀리 높다란 타워가 보여 바로잡을 수 있었다. 고료카쿠는 에도시대 말기에 건축된 요새다. 미일화친조약으로 하코다테항을 개항하면서 북방 방위와 관청의 역할을 할 요량으로 건설되었다. 한자를 풀어보면 다섯(오-五) 모서리(능-稜)의 외성(곽-郭)이라는 뜻으로 선명한 별모양이 고료카쿠의 특징이다. (근데 별모양이면 십릉각이어야 하는 거 아닌지...) 당시 서양식 축성법을 이용하여 건설되었는데 총과 대포의 사용이 주가 된 근현대 전쟁에서 사각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별모양의 요새가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성벽 바로 아래 서있으면 대포로 쏘기가 힘든데 별모양이라면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에서 안쪽으로도 포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구조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고료카쿠가 유명한 것은 축성 당시보다는 그 이후의 보신전쟁때문이다. 무진(일본어로 보신)년에 시작되어 다음 해에 끝난 일본의 내전으로 천황을 바지사장으로 세우고 쇼군이 통치하던 막부체제를 유지하자는 막부파와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쇼군을 없애자는 도막파(막부 타도)가 붙었던 전쟁이다. 도막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막부파의 잔당들이 하코다테에 모여들었고 이곳에 모인 막부파와 신선조 등이 최후까지 결사항전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특히 고료카쿠가 막부파의 요새로 쓰이면서 독특한 외관과 함께 많은 이야기의 산실이 된 셈이다. 

    타워로 가는 길에 두 젊은이가 팔을 교차하고 서있는 동상이 있었다. 젊은 별들(若き星たち)이라는 이름의 동상은 당시엔 무엇인지 몰랐는데 집에 돌아와 고료카쿠의 역사를 조사한 후에는 조금 달리 보였다. 보신전쟁 막바지에 하코다테에서 싸웠던 무명의 병사들의 화합을 그린 동상이라고 한다. 한 명은 막부군, 한 명은 도막파(정부군)의 청년으로 전쟁의 종식 후에는 하나가 되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전쟁에서 사망한다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위해선 어찌 보면 필요했을지도 모르는 희생이었겠지만 개인의 인생이라는 관점에선 너무나 덧없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와 죽는 사람도 전쟁에는 많지 않은가. 죽은 사람을 영웅화하고 기리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자기 위안을 위한 기만일지도 모르겠다. 

     

     

    젊은 별들 동상

     

     

     

    고료카쿠 타워에 다가가다 보니 럭키 삐에로를 만날 수 있었다. 럭키 삐에로는 홋카이도에서도 하코다테에서만 만날 수 있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다. 기본적으로 수제버거를 팔고 있지만 점포에 따라서 카레를 파는 등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하코다테에만 17곳이 영업 중이고 그 외의 지역에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하코다테를 방문했다면 꼭 한 번은 들러보는 것이 좋다. 럭키삐에로는 하코다테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패스트푸드인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하코다테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격도 과하지 않은 편이고 맛도 괜찮다. 채소는 하코다테산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홋카이도산을 쓰는 등 산지 자체 생산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러니 하코다테 사람들이 더더욱 좋아할 수밖에. 다만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았던 관계로 고료카쿠 타워를 먼저 구경한 뒤 나오면서 먹기로 하고 일단은 지나쳤다. 

     

     

     

    럭키삐에로 - 고료카쿠공원앞

     

     

    마침내 고료카쿠 타워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규모에 놀라웠다. 넓고 높은 공간이 펼쳐지고 내부도 상당히 깔끔했다. 철골구조에 유리를 덮어 햇빛이 사방에서 쏟아져들어오는 구조로 하얀색 페인트를 칠해 내부가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식물들이 장식되어 있고 카페도 있어서 근처에 살고 있다면 친구와 잠시 들러 티타임을 가지기에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물론 관광객이 많아진다면 별로겠지만 마침 내가 도착한 시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고료카쿠타워는 사실 1960년에 고료카쿠 축성 100주년을 기념하여 60m의 높이로 처음 건축되었다. 이후 2006년에 그 옆에 107m의 높이로 새로 건축되고 기존의 타워는 철거되었다. 타워를 건설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게, 고료카쿠는 지상 높이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성곽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타워를 올라서 보면 선명한 오각별모양을 볼 수 있고 규모감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변에 산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타워의 건설은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줄을 서서 타워를 오르는 티켓을 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선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인 세잎 제비꽃 문양이 많이 보였다. 여기에는 고료카쿠가 막부군(쇼군옹호파 = 도쿠가와파)의 마지막 보루였다는 점이 작용한 것 같다. 기념품 판매점 쪽에도 신선조의 톱니문양이 보이는 등 에도시대를 느끼게 하는 물품들이 많았다.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이 공간의 주인공같이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상의 존재였다.

    동상은 '히지카타 토시조'로 신선조의 부장이자 보신전쟁의 마지막까지 결사항전했던 인물이다. 에도막부 말기에 막부파 요인들의 암살이 종종 이뤄지면서 이에대한 자경단 성격으로 결성된 것이 신선조였다고 한다. 우리가 만화 '바람의 검심'에서 보았던 신선조의 이미지는 화려한 검술을 구사하는 검객 집단이지만 실제로는 준 군사조직에 가까워서 1대 1 대결보다는 다수로 소수를 제압하는 것이 주였다고 한다. 자경단이 준 군사조직이 되고 막부의 인정까지 받으면서 힘이 실리자 부원들 중에도 일탈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히지카타 토시조는 엄격한 규율을 들어 이들을 처단하거나 할복을 명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일명 '귀신부장'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후 보신전쟁이 일어나면서 신선조도 도막파의 반대편에 서서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영 좋은 성과는 보이지 못했고 결국 하코다테에서 재집결하여 다시 한번 싸웠지만 패하고 만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히지카타 토시조는 피격되어 사망하고 막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막부의 존속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서 신념을 가지고 끝까지 도전하다 이른 나이(34세)에 사망한 히지카타 토시조의 모습에서 영웅적인 서사를 느낀 후대의 사람들이 하코다테 고료카쿠의 주인공으로 그를 모시고 있는 듯하다. 신선조가 일본의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속에서 낭만적으로 묘사되고 이후 만화 등 서브컬처에서도 좋은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인기가 더욱 올라갔다고 한다. 아 그리고 당대의 인사들의 언급도 인기에 한몫한 것 같다. 큰 키에 하얀 피부로 잘생긴 인물이었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역시 미모를 이기는 서사는 없다.

     

     

    고료카쿠 타워 내부
    히지카타 토시조 동상

     

     

    타워에 올라 마주한 고료카쿠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사전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찾았던 한 블로그에서는 "사진이 현실의 반의 반도 담지 못했다."고 했는데 크게 공감했다. 자로 잰 듯한 오각별의 반듯한 모습과 그 주위를 둘러싼 해자, 그리고 단풍이 내려앉아 울긋불긋한 인공섬의 모습이 한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랗게 다가왔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재의 거대한 규모감에 압도되었던 것 같다. 지상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모습이라서 고료카쿠타워의 존재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요새 내부에는 봉행소 등 과거의 건물을 몇 개 복원해 두었으나 정작 들어가보면 그다지 볼만한 게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다시 내려가 들어가 볼 생각은 안 하고 타워에서 하염없이 구경했다. 한참을 보고 사진을 찍고 해도 질리지 않았다. 고료카쿠 타워의 안내책자에 따르면 벚꽃철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핑크빛 오각별이 되고 여름엔 푸르르며 가을엔 이처럼 울긋불긋하고 겨울에 하얀 눈이 내려앉으면 순백의 오각별이 된다고 했다. 어느 계절에 와도 멋진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계절에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료카쿠 타워에서 본 고료카쿠
    잘 다듬어진 정원과 예리한 별의 각도
    복원된 봉행소
    하코다테야마와 시가지
    고료카쿠 타워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미니어쳐
    바닥이 슬쩍 보이는 아크릴 구조
    하코다테의 굴뚝

     

     

    이날도 1일 1소프트아이스크림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료카쿠타워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뽀갰다. 여러 가지 맛이 있었지만 이곳의 특징적인 아이스크림은 신선조 아이스크림이다. 신선조 복장에 쓰였던 형광하늘색을 아이스크림에 구현해 두었는데 밀크아이스크림과 믹스로 주문했더니 정말 신선조 톱니무늬 같은 문양이 나와서 신기했다. 맛은 뽕따와 비슷한 소다향이었는데 뭔가 미세한 입자감이 느껴서 홋카이도에서는 가장 맛없었던 아이스크림으로 기억되었다. 생각해 보니 일본의 관광지에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없는 경우가 잘 없고 지역 특색에 맞는 아이스크림도 많은데 언젠가는 일본 소프트아이스크림 로드맵을 만들어보고 싶어 진다. (살을 얼마나 더 찌우려고?)

     

     

    신선조 아이스크림
    고료카쿠타워 1층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니 슬슬 배가고파질 즈음이어서 미리 봐두었던 럭키삐에로로 향했다. 가장 유명한 메뉴인 차이니즈 치킨버거를 세트로 시키려니 점원이 "음료는 우롱차고 세트로 하시면 음료 교환이 안된다."라고 하셨다. 세상에 패스트푸드에 우롱차라니. 너무나 실망스러웠지만 그것이 로마법이라면 따르는 수밖에. 알았다고 하고 번호표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럭키삐에로는 하코다테에 17개의 점포가 있고 기본적으로 삐에로라는 마스코트가 공통적으로 있지만 점포의 인테리어는 각 점포의 사장님께 맡기기라도 하는 건지 모두 다르다.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니 창업자인 오이치로 회장이 개별 점포의 인테리어를 결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원래 천사 굿즈 마니아였다고 하는 듯. 서커스를 좋아해서 가게 이름을 럭키삐에로라고 지었다고 하는데 좋아하는 게 되게 많은 양반인가 보다. ) 하코다테점의 인테리어 테마는 '천사'로 조명이나 벽에 걸린 액자 곳곳에서 천사를 만날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7080의 분위기가 나는데 점포 내의 의자나 식탁도 레트로 하고 잡다하게 걸린 광고들도 그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금 정신이 사나워 보이기도 하는데 그게 또 특색이라면 특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기다리니 점원이 음식을 서빙해 주었다. 이 것도 레트로한 느낌이었다. (패스트푸드는 셀프서비스라는 인식이 박혀버려서 그런 것 같다.)

    차이니즈 치킨버거는 간장소스를 버무린듯한 치킨이 잔뜩 들어간 햄버거였다. 소스가 조금 센 감이 없지않아 있는데 그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감자튀김은 머그컵에 담겨오는데 그레이비소스가 끼얹어진 상태로 온다. 양이 제법 되어서 감자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홋카이도산 감자라 서그런가 맛도 좋았다. 음료는 위에 거품이 뽀골뽀골 올라와있기에 혹시 탄산우롱차인가 싶었는데 말 그대로 얼음 우롱차였다. 몇십 년을 햄버거엔 콜라로 살아와서 그런가 우롱차와의 조합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정말 목이 막힐 때 한 모금씩만 했을 뿐 청량감이 없어 너무나 아쉬웠다. 다음에 다시 럭키삐에로를 찾을 일이 있다면 세트가 아니라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단품으로 시키고 탄산을 따로 시키고 싶다. 탄산이 없던 이날의 슬픔을 꼭 기억해둬야 할 텐데.

     

     

    012
    럭키삐에로 차이니즈 치킨버거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노면전차를 이용해 주지가이역에서 내렸다. 하코다테 관광의 필수코스인 하치만자카를 구경할 요량이었다. 교차로에 웬 기둥 위 초소가 있어서 가까이 가보니 교통신호 제어 및 전차 노선 변경을 위해 직접 신호를 주던 신호수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1995년까지는 실제로 사용도 되었는데 자동화 시스템의 발달로 결국 사용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일본에 마지막 남은 신호탑이라는 의미 덕분에 철거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적혀있었다. 본래는 교차로 반대쪽에 있었는데 도로확장을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두었다는 내용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근현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에만 의미를 두는 경향이 있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서는 이렇게 근현대의 유물들을 잘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녹이 잔뜩 슬어있는 안내판일지라도 시대를 상상하고 싶은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바탕으로 사극이 찍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스위치 타워
    스위치 타워 안내판

     

     

    하코다테야마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다 보면 점차 이국적인 내음이 난다. 고베의 이진칸에서 느꼈던 서양식 건축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때문이었다. 미일통상조약으로 개항된 두 곳 중 한 곳이 바로 하코다테다. 아무래도 서양의 문물을 조금 더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날씨는 흐렸지만 비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고, 어디를 보아도 불타는 듯한 단풍이 가득했다. 비가 오면서 온도가 조금 떨어져서 그랬는지 낙엽이 떨어지고 있어서 그 부분이 참 아쉬웠다. 한두 주 정도만 일찍 왔어도 더 풍성한 단풍나무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싶었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은 가을의 정취보다는 겨울의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하치만자카로 올라가는 길은 아스팔트가 아니고 비정형의 돌을 깔아 만든 길이었다. 울퉁불퉁한 길은 자동차를 타는 사람의 승차감을 헤치겠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겐 신선한 볼거리였다. 빗물이 돌 사이사이를 흐르면서 수백 갈래로 갈라지는 모습은 비가 올 때만 볼 수 있는 풍경이리라. 물론 그런 거 안 보고 화창한 하치만자카를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특히나 나같이 비 오는 날이면 따뜻하고 습한 날씨에 노출된 껌처럼 변하는 사람이라면.  

    비가 와서 그랬을까 컨디션이 상당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보통 비가 오면 두통이 오거나 몸살기운이 있게 마련인데 이 날은 배가 아팠다. 사실 비가 와서라는 것은 핑계고 열심히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주워 먹고 다닌 것이 드디어 사달이 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얼마 전에서야 내가 유당불내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우유를 자제하고 있던 차였는데 소프트아이스크림의 원료를 전혀 생각지도 않고 1일 1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챙겨 먹은 것이 누적된 것은 아닐는지. 배가 쌀쌀한 정도가 아니라 급박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중이라 이때부터는 식은땀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치만자카 근처에는 화장실은커녕 커피숍도 쉽게 보이지 않았다. (있는데 정신이 날아가서 안보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급하게 지도를 보니 근처에 모토마치 성당이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랜드마크고 만인에게 열려있는 성당이니 화장실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걸음으로 성당을 향해 달리듯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멋진 풍경을 보면서 사진 한 장을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좋은 풍경이 나올 때마다 괴로움은 커져만 갔다.(나 바쁜데 왜 사진 찍게 하냐고!!) 그렇게 도착한 성당에 화장실은 없었다. 성스러운 곳을 화장실 때문에 찾은 것에 대한 벌이었던 것일까. 

     

     

    동본원사 하코다테별원
    이국적인 도로 - 처음엔 이 길이 하치만자카인가 했다.
    모토마치 성당
    성 요한 교회

     

     

     

    더 이상 하치만자카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게 화장실이 있을 법한 곳을 확인해 보니 결국 하코다테 아카렌가 창고군이었다. 이때부터는 내 몸속 어떤 장기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열려는 자와 닫으려는 자의 싸움. 그렇게 힘들게 내달려서 해산물을 판매하는 시장건물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화장실이 비어있었다. 그리고 성당에서 찾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이곳에서 찾았다. 

    건물을 나왔을 때 세상은 아름다웠다. 비도 약간 더 그쳐있었고, 눈앞에는 그 유명한 카네모리 아카렌가 창고군이 있었다. 보통 눈 덮인 풍경으로 많이 봤는데 하코다테야마의 단풍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붉은 벽돌 건물도 운치가 있었다. 건물에서 산까지 단풍이 이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가을철에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이 있었다.

    아카렌가 창고는 카네모리 양품점이 창고의 필요성을 느끼고 하코다테항의 비어있는 창고를 구입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카네모리 한자를 살펴보면 금(金)이 빽빽(森)하게 있다는 뜻이라서 큰돈을 벌겠다는 창업주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아카렌가 창고군에는 ㄱ자 아래에 빽빽할 삼(森) 자를 넣은 한자가 새겨져 있다. 항구의 붉은 벽돌 건물은 오타루에서도 볼 수 있고 우리나라의 인천 개항장 근처에서도 볼 수 있는데 1900년대 전후의 창고건물의 대표 양식이었던 것 같다. 붉은 벽돌(아카렌가)과 커다란 철문이 특징인데 레트로라고 하기엔 우리 기억에 없는 역사 속 건물이기 때문에 클래식하다는 표현이 맞지 싶다. 내부에는 기념품이나 공예품점, 식당 등이 있는데 내 관심사는 아니라서 외관만 슬쩍 보고 다시 하치만자카를 향해 올라갔다.

     

     

     

    하코다테항 풍경
    카네모리 아카렌가 창고군

     

     

     

    홋카이도 대부분이 1900년대에 들어서나 개발이 시작된 계획도시이다 보니 곧게 뻗은 도로가 많다. 하치만자카는 하코다테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들러보는 곳으로 바다까지 쭉 뻗은 도로가 속이 다 시원하고 좌우로 예쁜 건물과 나무가 많아서 그림이 된다. 내가 막 도착했을 때에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이겨내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비가 와서 낙엽이 많이 떨어진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알록달록한 가을의 분위기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자카의 도로를 마저 넘으면 하치만궁 신사가 있고 근처에 하코다테 공원이 있는데  이는 여행을 다녀온 뒤에 조사하면서나 알게 된 사실이다. 알았다면 들러보았을 것 같은데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다. 이렇게 다시 하코다테를 찾아야 할 이유를 하나 남겨놓게 된다. 

     

     

     

    하치만자카
    하치만자카

     

     

    하치만자카 근처에서는 교회와 성당 건물들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야 흔한 일이지만 일본에 여러 번 다녀온 나로서는 꽤나 진기한 풍경이었다. 일본의 기독교계열 신도는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를 보는 것이 꽤나 어려운 나라다. 가끔 여행을 다니다 만나게 되는 교회를 보면 꽤 놀라게 되는데 하코다테에는 한 장소에 무려 네 곳이나 존재한다. 성 요한 교회는 영국 성공회, 하리스토스 성당은 러시아 동방정교회, 모토마치 성당은 천주교, 그리고 일본 기독교단 하코다테 교회는 개신교 교회다. 미일조약으로 개항이 빨랐던 것이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심지어 홋카이도의 기독교인구는 전체의 3%에 이른다고 하니 다른 지역보다는 확실히 교회가 많을 법도 하다. 교회 건물마다 특색이 있어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길을 마저 걸어가면 유명한 건물인 구 하코다테 공회당이 있다. 약간 푸른 기운을 내는 회색 벽에 창틀과 난간, 장식 등을 노란색으로 칠해서 대단히 화려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클래식한 서양식 건축물인데 규모도 크고 색채도 화려하다 보니 눈이 절로 간다. 내부에는 거대한 연회장이 있고 황족이 방문할 때는 귀빈실로 쓰이는 곳도 있다고 한다. 내게는 조금 다른 의미였는데, 앞서 언급했던 소년탐정 김전일 이진칸호텔 살인사건의 호텔이 이 건물을 모티프로 했기 때문이다. 호텔의 형태가 매우 중요한 트릭이 되었기 때문에 건물의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만화에서는 3층건물이었고 앞에 넓은 연못이 있는 구조로 그려졌다는 점은 달랐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형태가 같았다. 김전일 덕후가 이렇게 성지순례를 하게 되는구나 싶었다. 

    이진칸 호텔... 아니 구 하코다테 공회당은 언덕 위쪽의 탁 트인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곳에서 하코다테항이 시원하게 보였다. 공회당 앞에는 모토마치공원이 있을 뿐이라서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날씨가 조금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싶었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적당히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하는가 보다. 그래야 여행이 즐거워지니까. 

     

    구 하코다테 공회당
    구 하코다테 공회당
    모토마치 공원
    모토마치 공원
    구 홋카이도청 하코다테 지청 청사와 구 하코다테 공회당
    하코다테 노면전차

     

     

     

    하코다테의 핵심지역들이라고 할 만한 곳들을 순회한 뒤 체크인을 위해 호텔로 향했다. 하코다테역에서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가격이 저렴한 개인실이 있다고 해서 하루 정도는 잘 쉬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약한 곳이었다. 한참 걸으며 긴가민가하다가 호텔을 발견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라서 놀랐다. 심지어 로비에 들어가서도 카운터까지 한참이나 걸어야 할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카운터에 바우처와 여권을 드리고 혹시 한국어 안내가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직원분이 크게 당황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 영어도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한국어 안내도 자주 쓰이지 않는 곳에 있어 찾는데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코로나 때문에 외국인이 거의 없이 3년을 지내면서 외국인 응대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렇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직원분이 최선을 다해 자료를 찾고 안내해 주시는 모습에서 기분이 좋아졌다. 방을 업그레이드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하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올라갔더니 이게 웬걸. 침대만 세 개가 있는 엄청나게 넓은 방이었다. 창 밖으로는 하코다테야마가 고스란히 보이는 좋은 방이었다.(야마뷰!) 평소 헝그리한 일본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넓은 방은 처음 써보는 것 같았다. 우선 욕실에 뜨거운 물을 받아 고생한 다리를 녹여주었다. 기껏 편하고 좋은 방을 받았는데 하코다테 야경을 보러 나가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애석하게도(?!) 비가 오던 날씨가 점차 개어서 야경을 볼 만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1시간 남짓의 목욕을 마치고 다시 하코다테역으로 갔다. 

    하코다테를 여행하면서 하코다테야마의 야경을 놓칠 순 없었다. 내가 워낙에 야경이나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려 세계 3대 야경에 속한다며 홍보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세계 신 3대 야경이라는 나가사키 이나사야마 전망대에서 별달리 느낀 것이 없어서 우선 3 대니 100 대니 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모이와야마 전망대에서 다시 신뢰를 회복한 상태였다. 하코다테의 야경은 세계 3대 야경에 속하면서 일본 3대 야경에 속하면서 또한 홋카이도 3대 야경에 속한다고 한다. 일단 야경 순위를 뽑으면 무조건 들어가는 곳이라고 봐야 하겠다. 

    하코다테야마 전망대에 오르는 방법은 등산버스를 이용하는 방법과 로프웨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동절기에는 눈이 많이 쌓여 등산버스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나는 동절기와는 거리가 먼 비수기 여행객이어서 상관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프웨이를 이용해 전망대로 이동한다. 시간이 적게 걸리기도 하고 시간대에 구애받지 않고 편한 시간에 오를 수 있으며 로프웨이가 주는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선 로프웨이를 이용할 수 없었다. 대수선기간이라고 해서 마침 내가 하코다테에 있는 동안 운행이 정지되기 때문이었다. 미리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현장에서 로프웨이가 운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크게 낙담하고 숙소로 돌아갔을 것 같다. 홈페이지에서 로프웨이 비운행 상황과 대안을 미리 알아두고 등산버스 시간표를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코다테역으로 갔다. 비가 완전히 그쳐서 우산을 반납하고 잠시 기다려 등산열차를 탔다.

    등산버스는 하코다테야마를 S자 곡선을 그리며 구불구불 올라갔다. 사람이 많아서 좌석에 앉지는 못했지만 일부러 창가 쪽에 딱 달라붙어있었더니 잠시 뒤 멋진 풍경이 나타났다. 버스가 크게 커브를 돌면서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하코다테의 풍경이 보였는데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질렀다. 나도 "이야~"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스름이 짙어지는 초저녁의 하코다테엔 가로등이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고 좌우로는 검은 바다가 커다란 호를 그려 육지를 삼키는 듯했다. 내게는 약간 한반도를 가로로 늘려놓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헤어핀 구간을 거듭하면서 점차 고도가 높아져 번번이 보는 풍경이 달라졌다. 하코다테 현지인은 로프웨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뷰를 보여주는 등산버스를 더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과연 그럴 법했다. 이렇게 보였다 안보였다 하면서 장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하코다테의 야경이라니. 케이블카를 타는 것에 절대 밀릴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하코다테야마 야경

     

     

     

    하코다테야마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거의 버스로만 실어 나르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올라와있었다니. 사실 하코다테의 낮풍경과 밤풍경을 모두 눈에 담고 싶어 숙소에 짐만 두고 바로 나오는 게 본래 계획이었는데 목욕을 하면서 몸이 녹아 흘러 1시간을 넘게 드러누워있다 나온 차였다. 이미 어스름이 충분히 내린 뒤여서 조금 더 일찍 올라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사람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난간 쪽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곳까지 이동하는데 줄을 서 있어야 할 정도였다. 사실 한국에서 10월 말에 안타까운 압사사고가 있었던 뒤라서 사람이 많은 것이 조금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난간 앞은 2층 높이 정도 되었는데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래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마침내 난간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하코다테의 야경. 예전에 모 여행프로에서 출연자들이 눈이 잔뜩 내려 쌓인 전망대에서 벌벌 떨며 구경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눈이 쌓인 골목골목에 가로등이 비쳐서 약간은 몽환적인 풍경이었는데 내가 갔던 시즌에는 당연히 눈구경은 할 수 없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낮에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했을 정도로. 

     

     

     

    0123
    하코다테 야경

     

     

    야경을 꾹꾹 눈에 눌러 담고 다시 버스를 타는 쪽으로 내려왔다. 로프웨이를 탔다면 건물 내부로 이동해서 기념품샵을 구경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건물 외부의 버스정류장을 이용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야경을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내려가는 사람이 한 번에 몰리면 버스에서 또 서서 내려가야 할 것 같아서 조금 아쉬운 채로 일찍 내려가기로 했다. 이미 줄을 길게 서있었는데 버스 한 대를 먼저 보내고 그다음 버스에서는 자리에 앉아 내려올 수 있었다. 이날도 하루종일 걸어 다니면서 다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앉아갈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했다. 앉은자리가 버스기사님 바로 뒷자리였는데 요금표가 상당히 복잡하고 재미있어서 계속 그것만 보았다. 중학생 이상은 대인, 초등학생은 소아, 1세 이상 소학교 미만은 유아(어린아이), 1세 미만은 유아(젖먹이 아이)로 나누고 구성에 따라 요금제를 나누어두고 그 구성에 따라 요금제를 또 세분화해 두었다. 어린아이가 많은 도시도 아닐 것 같은데 이렇게 디테일하게 구분하는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이것도 다 좌석에 앉아있었던 덕분에 다리에 여유가 있어서 눈에 들어왔지 싶다. 

     

     

     

    하코다테버스 요금표
    밤의 하코다테역

     

     

     

    저녁을 먹지 못한 상태라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 도시락을 샀다. 양념된 돼지고기 덮밥인데 일본에서 여행 중에 밥 먹을 시간이 안될 때 종종 먹는 메뉴다. 식사와 함께 홋카이도산 벌꿀유자사와 한 캔을 곁들이니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태블릿으로 영화 한 편을 보며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배가 조금 불렀는데 공짜로 준다는 야식 라멘이 궁금해져서 시간에 맞추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직접 재료를 하나씩 담아 먹는 시오라멘이었는데 국물맛이 제법 좋았다. 시오라멘이 내 취향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다음에는 라멘집에서 소유라면 말고 시오라멘을 먹어봐야지 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그동안은 돈코츠라멘이나 소유라멘만 주야장천 먹었고 시오라멘은 뭔가 심심할 것 같아 먹지 않았었는데 반성했다. 

     

     

    영화보며 저녁식사
    01
    야식 시오라멘

     

     

    야식까지 때려넣고 올라와 두 번째 목욕을 마친 후 침대에 누웠다. 계속 토굴 같은 2층침대만 사용하다가 오랜만에 넉넉한 이불과 빵빵한 베개를 만나니 오히려 잠이 안 왔다. 그냥 푹신함과 뽀송함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여행이 이제 하루 반나절 밖에 남지 않았다. 모든 여행에는 돌아갈 때가 있게 마련인데 나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여행기간이 열흘로 늘어도 한 달로 늘어도 이 마음은 똑같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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