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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5)
    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23. 7. 24. 12:21

    5일차 본래 계획표, 오유누마를 유노하라 관람이라고 써둔 정신머리

     

     

    오랜만에 넓은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던 덕분에 아침에 꽤나 상쾌하게 기상할 수 있었다. 잠도 다 깨지 않은 채로 욕조로 달려가 뜨끈한 물에 반신욕을 하면서 다리의 피로를 한번 더 풀어주었다.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숙소를 나가기가 싫었다. 체크아웃 시간은 한참 남아있는데 무슨 욕심으로 이렇게 아등바등 돌아다니나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힘들다고 쉬어버리면 한국에 돌아가 보지 못한 곳들을 한참이나 더 아쉬워하게 된다. 하루만 더 악바리 근성으로 버티기로 하고 눈물을 머금으며 숙소를 나섰다. 

     

     

    너무나 편안했던 숙소
    하코다테 야마 전망대가 보이는 뷰

     

     

    다시 숙소를 이동하게 되는 것이라서 두고 가는 것 없이 짐을 싹 다 챙기다 보니 가방이 묵직했다. 사실 삼각대며 카메라 렌즈들이며 무게가 보통이 아니라서 이미 묵직한데 가는 곳에서 조금씩 기념품들을 챙기다 보면 무게가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노면전차를 타러 가는 길에 등짝이 묵직하게 느껴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게 다 내 업보구나."라는 것이다. 사진 좀 멋지게 건져보겠노라며, 나중에 찾아보고 추억에 잠길 것이라며 챙기는 것들이 나의 고통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사실 렌즈는 거의 하나만 줄창 쓰고 기념품은 조금만 지나면 찾아보지 않게 된다. 이것들을 들고 다니지 않았을 때의 홀가분함을 알지만 '만에 하나 나중에 쓸 수도 있어'라는 것이 나라는 인간의 고통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 고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내가 갑자기 무소유에 눈떠 모든 것을 훌훌 버리게 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날씨가 너무나도 좋아 그래도 발걸음이 절로 나아갔다. 이틀차의 하코다테에서 만난 새파란 하늘. 사방으로 뚫린 도로가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맑은 공기. 홋카이도의 청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역으로 가는 길에 만난 '오시마신용금고'의 간판을 보면서 "오지 마 신용금고"로 보인다며 셀프 아재개그를 치고 사진을 찍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출근시간대의 하코다테역에는 여행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더 많아 보여 우쭐하게 여유를 즐겼다. 나치고는 꽤나 늦은 시간인 9시가 다되어서 출발하는 오누마공원역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했다. (그 열차가 가장 빨랐다.) 

     

     

    오시마신(용)금(고)
    하코다테역을 배경으로
    맑은 날의 하코다테역
    돈부리요코초 - 하코다테 아침시장

     

     

    이른 아침이지만 열차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정석을 예약하여 창가 쪽 좌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바깥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멀리 평평한 지형에 볼록 솟아오른 하코다테야마의 모습을 보며 '내가 어젯밤 저곳에 있었지.'라는 추억에 잠겼다. 하코다테산은 가만히 있는데 앞에 있는 나뭇잎들만 재빠르게 지나가 내가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그 멋졌던 야경을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이에 열차는 오누마공원에 접근하고 있었다.

    복도 건너편 쪽 창가에 무언가 삐죽한 산이 눈에 들어오면서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고마가다케 산이었다. 묘하게 뾰족한 그 산봉우리는 아마도 점성이 높은 용암이 갑작스레 폭발하면서 생긴 형태이지 싶다. 예전에 호박엿을 먹던 때가 생각났다. 말랑말랑하게 해서 좌우로 쭉 잡아당기면 가운데 부분이 가늘어지다가 뚝 끊어져 뾰족한 형태가 되지 않던가. 딱 그렇게 만들어졌지 싶은 모양이었다. 일본이 화산의 나라라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 열차 안의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창문에 매달려 그 산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그 순간 모두 한마음이었지 싶다.

     

     

    멀어지는 하코다테야마
    고마가다케

     

     

    오누마공원은 원래 전날 방문하기로 생각했던 곳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관계로 공원을 걸어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다음날로 미뤘던 것인데 운이 좋았는지 날씨가 아주 짱짱했다. 새파란 가을하늘까지는 아니라도 군데군데 푸릇한 하늘이 보이는 좋은 날씨였다. 오누마공원 역에 내리니 자전거를 렌털하는 분이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자전거는 호수를 타고 크게 돌아보는 코스고 도보로는 호수 내부의 작은 섬들을 걸으며 구경할 수 있었다. 자전거도 타고 돌아보고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조금 애매하기도 했다. 자전거로 돌아볼 수 있는 공간과 걸어서 볼 수 있는 공간에 차이가 있어서 조금 고민을 하다가 여유 있게 걸으면서 구경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오누마공원은 1958년 국정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공원 같은 개념인 듯싶다. 오누마, 고누마, 준사이누마 3개 호수가 근처에 있다. 그 중 오누마 호수가 가장 큰데 둘레가 24km에 이른다고 한다. 여의도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 대략 8km 정도 되니까 그 세배쯤 되는 셈으로 상당히 크고 넓은 호수다. 오누마호수에는 126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몇몇 굵직한 섬들을 16개의 다리로 연결하여 다양한 위치에서 호수를 관람할 수 있었다. 마침 가을에서 겨울로 도착하는 길목에서 방문했는지라 울긋불긋한 낙엽이 나무 위에도 바닥에도 잔뜩 있었다. 산책로를 걸으며 푹신한 낙엽을 원 없이 밟을 수 있었다. 날씨가 워낙 좋고 바람도 별로 없어서 호숫가에는 아주 잔잔한 물결만이 일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도 많지 않아서 정말 고요하고 호젓한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오누마 국정공원과 고마가다케산
    오누마호수 풍경
    전날의 비로 젖은 낙엽들

     

     

    오누마공원을 걷던 중 바닥에서 표지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센노카제니낫데)'라는 명곡이 탄생한 곳이라고 쓰여있었다. 내가 대중문화에 조금 취약해서 당시에는 그 노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귀국한 후 노래를 찾아 들어보았다. 죽은 이의 시점에서 산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절절한 노래가 가슴에 와닿았다. 우리나라에선 팝페라 가수인 임형주 씨가 불러 유명해졌고 방송에서 사람들을 추모할 일이 있을 때 종종 쓰이는 듯했다. 내가 처음 들은 곡이 일본 아라이 만의 버전이라 그런지 그 노래가 가장 사무치게 들린다. 

    본래 가사는 작가 미상의 영문시를 번안한 것으로 작곡가 아라이 만이 여기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다. 친구 아내가 병으로 죽자 추모 문집이 나왔는데 거기에 이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읽은 아라이 만이 오누마에 있던 별장에서 호숫가에 불어오는 바람에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언급한 바 있어 호수에 작은 표지로 기록된 듯하다. 아라이 만도 2021년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오누마의 바람이 되어 하늘을 날고 계시지 않을까.

     

     

     

    私のお墓の前で 泣かないでください
    와타시노 오하카노 마에데 나카나이데 쿠다사이
    나의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 주세요

    そこに私はいません
    소코니 와타시와 이마센
    그곳에 나는 없어요

    眠ってなんかいません
    네뭇테 난카 이마센
    잠들어 있지 않아요

    千の風に
    센노 카제니
    천 개의 바람이

    千の風になって
    센노 카제니 낫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あの大きな空を 吹きわたっています
    아노 오키나 소라오 후키 와탓테 이마스
    저 넓은 하늘을 날아 건너고 있어요

    秋には光になって 畑にふりそそぐ
    아키니와 히카리니 낫테 하타케니 후리 소소구
    가을에는 빛이 되어 들녘에 내려 비춰요

    冬はダイヤのように きらめく雪になる
    후유와 다이야노 요니 키라메쿠 유키니 나루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돼요

    朝は鳥になって あなたを目覚めさせる
    아사와 토리니 낫테 아나타오 메자메사세루
    아침엔 새가 되어 당신을 깨울게요

    夜は星になって あなたを見守る
    요루와 호시니 낫테 아나타오 미마모루
    밤에는 별이 되어 당신을 지켜봐요

    私のお墓の前で 泣かないでください
    와타시노 오하카노 마에데 나카나이데 쿠다사이
    나의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 주세요

    そこに私はいません
    소코니 와타시와 이마센
    그곳에 나는 없어요

    死んでなんかいません
    신데 난카 이마센
    죽은 것이 아니에요

    千の風に
    센노 카제니
    천 개의 바람이

    千の風になって
    센노 카제니 낫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あの大きな空を 吹きわたっています
    아노 오키나 소라오 후키 와탓테 이마스
    저 넓은 하늘을 날아 건너고 있어요

    千の風に
    센노 카제니
    천 개의 바람이

    千の風になって
    센노 카제니 낫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あの大きな空を 吹きわたっています
    아노 오키나 소라오 후키 와탓테 이마스
    저 넓은 하늘을 날아 건너고 있어요

    あの大きな空を 吹きわたっています
    아노 오키나 소라오 후키 와탓테 이마스
    저 넓은 하늘을 날아 건너고 있어요

    -가사와 번역은 나무위키에서 발췌-

     

     

    천개의 바람이 되어 명곡 탄생지

     

     

    다음에 이동할 열차시간을 정해두었던 터라 남은 시간을 2로 나누어 최대한 갈 수 있는 만큼 가본 뒤에 돌아오기로 했다. 시간이 한정적일 때 이런 방식을 자주 사용하는데 가면서는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시간이 더 걸리지만 돌아오는 길은 곧바로 돌아오게 되어 교통편에 탑승하기 전에 넉넉하게 돌아올 수 있다. 한 시간 남짓 호수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며 나도 열심히 영감을 긁어모았다. 차분한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구경을 할 때는 섬의 다리로 돌아다니고 돌아올 때에는 열차 선로 쪽 곧게 뻗은 길로 왔다. 

    역 근처에 돌아오니 시간이 생각보다 넉넉하게 남았다. 고민을 하다가 출출하기도 하고 해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기로 했다. 전날 비도 온 데다 11월의 홋카이도는 생각보다 쌀쌀한 편이라서 아이스크림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와 간단한 디저트를 판매하는 MORI라는 통나무집 같은 곳이 보여서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계속 먹을 기회를 놓치고 있는 유바리 멜론이 들어갔다고 하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있어 시켰는데 메로나 생각이 많이 났다. 물론 훨씬 부드럽고 녹진하지만 어쨌든 향 자체는 메로나였다. 가게 앞의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먹고 있는데 가게에서 방금 주문을 받으셨던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추운데 들어와서 드세요."

     

    사실 일본에서 먼저 나서서 친절을 베푸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부탁을 했을 경우에는 친절함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정말 많았지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은 잘 없다. 원치 않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은데 사실 우리나라로 치면 정이 없어 보이는 느낌도 있다. 혼자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참견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화목난로에 땔감이 타고 있어 공기가 훈훈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가게가 정말 예쁘다는 둥 너스레를 떨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언젠가 다시 홋카이도를 찾게 되면 이곳을 방문하고 싶다. 장소가 아닌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은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행복이다. 

     

     

    고마가타케
    오누마 호수 유람선
    오누마호수와 고마가타케
    신기한 꽃
    한량짜리 열차
    가을 홋카이도의 선로
    오누마공원 역 풍경
    유바리 멜론 소프트 아이스크림
    따스한 친절
    아이스크림 가게
    오누마공원 역

     

     

    사실 5일 차의 여행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도야호수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도야호수는 오누마에서 노보리베츠로 가는 길 사이에 있다. 우스산과 쇼와신잔에서 화산지형을 구경하고 넓은 화구호인 도야호수를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도 대중교통으로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택시까지도 고려는 해봤지만 앞서 니세코에서 한번 택시를 찾지 못해 크게 데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언젠가 차를 렌트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도야호수를 지나쳐 노보리베츠로 직행하는 코스로 결정했다. 도야역을 지나치면서도 포기가 안되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우치우라만을 지나가며

     

     

     

    마침내 열차가 노보리베츠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로 유명하다고 했는데 의외로 내리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의외로 황량한 관광지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지옥계곡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아마도 사람들이 오전 중에 많이 들어간 것이던가 단체 버스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던가 하지 않았나 싶다. 왠지 사람들이 버스표를 판매하는 자판기에서 줄을 서 있기에 나도 구입해야 하는 것인가 싶어 얼른 사두었다. 안심하려고 사둔 표인데 버스를 타고 산기슭을 구불구불 올라가면서 혹시 맞지 않는 금액권을 구입한 것이 아닌가 싶어 전전긍긍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선 추가금을 내면 되기는 할 텐데 내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유로 생기는 실랑이가 불안한 것이다.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으면서도 항상 이런 걱정을 하게 된다. MBTI에서 N타입이 걱정을 사서 한다더니 딱 내가 그 꼴이다. 

    노보리베츠역 출구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곰 목상과 커다란 곰 박제가 있었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곰은 귀여운데 곰 박제는 위압감이 들었다. 내가 살면서 곰에 대해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은 고작 곰돌이 푸 정도가 전부였다. 곰이라기보다는 곰돌이라는 모양새로 곰을 인식하고 있던 내게 거대한 실물 곰 크기의 박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코카콜라의 북극곰이나 각종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조금은 우둔하고 귀여운 곰들을 보며 커왔을 것이다. 그 결과 사실 그들이 엄청나게 강력한 맹수라는 사실은 종종 잊고 살게 된다. 일본에서는 종종 곰에 의해 사상자가 나오는데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시는 곰들을 귀엽게만 보기 힘들어진다. 마침 여행을 가기 전에 곰과 관련된 사건을 유튜브로 다수 접할 수 있었는데(하필이면 홋카이도 여행을 검색하다가 알고리즘이 나를 흉포한 곰의 세계로 이끌었다.) 하나같이 섬뜩한 이야기뿐이었다. 노보리베츠에는 곰목장이 있어서 야생에서 포획된 곰들을 사육하는 시설이 있다. 로프웨이를 타고 오르면 곰목장의 관람이 가능한데 나는 언제부턴가 동물원에 가면 동물들이 신기하지 않고 가엽게 여겨지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목장은 가보지 못했다.(그렇지만 관람을 해야 목장의 곰들도 간식이라도 한 끼 얻어먹게 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도 가엽고 참 결심이 쉽지가 않다.) 불곰 이야기는 아니지만 동물원을 보면 항상 생각나는 시가 있어 잠시 소개해보고자 한다.

     

    부산에 눈이 내리면 - 손택수

    부산에 눈이 내리면 북극곰이 운다
    북극곰이 제일 먼저 동물원 쇠창살을 흔들며
    으엉으엉 눈이 내린다고 운다
    향수병 같은 거야 잊은 지 오래지만
    제 똥을 짓뭉개고 앉아
    우울한 덩치로 늙어가는 짐승의 슬픔을 과연
    누가 알겠는가 눈이 내리면
    그도 내심 몸속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콧김이 송골송골 맺힌 코를 벌름벌름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사무쳐서
    북쪽을 향해 머리를 짓찧고 싶어지는 것이다
    눈이 귀한 남쪽 항구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부산에 눈이 내리면
    하나밖에 없는 동물원에 눈이 내리면
    북극곰이 정말 서럽게 운다
    긴 목에 목도리 하나 없이 겨울을 나야 하는
    기린은 이 겨울이 딱 질색이겠고
    낙타도 코끼리도 시큰둥 썰렁한 우리 안에 들어가
    전기스토브를 쬐며 덜덜 떨고 있겠지만
    눈이 내리면 북극곰 눈에는 모두가
    제 혈족으로 보이는 것이다
    흰 털가죽 뒤집어쓴 북극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 부산에 눈이 내리면 나도 따라 울고 싶어진다
    흰 털가죽 덮어쓰고 울타리 밖에 갇혀서
    으엉으엉 울타리 흔들고 싶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로프웨이를 타고 곰목장에 들어가야(심지어 로프웨이와 곰목장 입장료는 분리징수되지 않음) 굿타라호수 전망대에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차를 몰았다면 호수 가까이까지도 가볼 수 있지만 나는 대중교통으로만 이동하는 뚜벅이였기 때문에 그리 할 수 없었다. 5일 차의 일정에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 계획을 짜면서 힘들었던 기억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아쉬움을 안고 곰 박제를 보고 있자니 버스가 도착했다. 

     

     

    목제 곰 상
    노보리베츠역 곰 박제
    노보리베츠역 전경
    노보리베츠 역

     

     

     

    노보리베츠역에서 지옥계곡으로 이동하면서 커다란 도깨비 상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머리에는 뿔이 달려있고 입에는 커다란 송곳니가 있으며 호랑이 무늬의 가죽 반바지를 입고 방망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어렸을 적 읽었던 전래동화에 그려져 있던 모습이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구전설화 속 도깨비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나라 구전설화에서는 도깨비에 뿔이 있다거나 하는 언급은 거의 없고 송곳니 이야기는 아예 없으며 가죽바지로 대표되는 복장이라던가 하는 것이 정형화되어있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도깨비의 외형적 특성은 일제강점기에 전달된 것으로 일본 스타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야기를 살펴보면 성격도 꽤나 다른데 일본 도깨비(오니)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괴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우리나라 도깨비는 잡스런 귀신으로 장난이나 내기, 씨름 등을 좋아하는 인간 친화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홋카이도에서의 도깨비는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도깨비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두려워하던 것에서 파생된 개념이라는 설이다. 피부가 상대적으로 붉고 털이 많으며 원시적인 복색을 하고 있던 아이누족과 다투던 일본 본토인들이 그 두려움을 형상화한 것이 도깨비라는 설이다. 어찌 되었든 이제 우리나라 도깨비 하면 공유라는 배우의 이미지로 대동단결 된 것 같고 되려 전래동화 속 도깨비의 이미지는 희미해져 가는 중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부터 도깨비하면 공유부터 생각이 나니 말이다. 

     

     

     

    도깨비가 환영하는 노보리베츠 온천

     

     

     

    산골짜기 길을 구불구불 타고 오르니 갑자기 커다란 건물들이 잔뜩 나타났다. 노보리베츠는 홋카이도 개발이 이뤄지고 나서야 온천도시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후쿠오카의 구로카와 온천이나 유후인 같은 전통적인 온천마을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인 온천 리조트단지의 형태를 띤다. 기본적으로 10층 이상 되는 거대한 건물들이 쿠스리선벳츠 개천 좌우로 수두룩 빽빽하게 건설되어 있어 전문 관광단지라는 느낌을 팍팍 풍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설악산 대명리조트 같은 건물들이 쭈욱 늘어서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깔끔한 설비로 온천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적합하지만 나 같은 가난뱅이 여행객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애초에 1박에 2만 원도 안 하는 숙소에 묵으면서 돌아다니는 여행인데 이런 리조트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다만 언젠가 주머니가 넉넉해지면 그때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보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노보리베츠 온천을 찾은 이유는 이 거대한 리조트단지 너머에 있는 오유누마와 오쿠노유라는 천연 온천호수, 그리고 지옥계곡(지고쿠다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있는 도깨비상 - 도깨비에도 아들이 있다는 설정

     

     

    노보리베츠는 아이누어로 색이 짙은 강을 의미한다고 한다. 투명하지 않고 혼탁한 색을 보이는 온천수이기 때문에 옛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노보리베츠 정류장에서 높은 곳으로 계속 도로를 타고 걷다 보면 "오유누마천 천연족탕"이라고 쓰여있는 팻말이 나온다. 졸졸 흐르는 개천 옆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르면 데크에 방석이 놓여있어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이 나타난다. 원래 계획으로는 여기서 발을 한번 담가보고 가려고 했는데 아직 피로가 쌓인 것도 아니고 해서 오유누마 호수까지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여기서도 다시 앞선 교훈을 상기시켜 본다. 눈에 보였을 때 해야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유누마를 보고 지옥계곡까지 감상하면 족탕을 멀리 빙 돌아가는 코스가 되기 때문에 다시 돌아와서 발을 담그기가 쉽지 않다. 가능하더라도 효율이 매우 떨어지는 일인 셈이다. 다음에 이곳을 찾는 분이라면 지옥계곡을 먼저 보고 온천호수를 본 뒤에 샛길로 내려와 피곤한 다리를 족탕에 담가주는 것을 추천한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이렇게 샛길 위주로 된 코스를 이용하기 어렵다고 하니 이 부분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온천이 흐르는 산 자체는 가끔씩 계란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의 여느 산자락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풀이 자라지 못하고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구멍들이 나타난다는 점은 꽤나 큰 차이라고 하겠다. 산을 오르는 중턱에서 그런 곳을 하나 발견했는데 예전에는 관람이 가능했던 곳이지만 현재는 출입금지 팻말을 붙여놓은 상태였다. 증기의 힘이 세져서 간헐천처럼 솟구치게 되었다던가 혹은 주변 땅이 물러져서 위험해졌다던가 하는 이유에서 막아둔 것이리라. 나무로 어설프게 막아놓은 담장 너머의 풍경이 너무나 궁금했지만 역시나 안전이 제일이다. 호기심은 털어두고 찬찬히 산길을 오르며 숨이 점점 가빠올 때쯤 깔끔한 도로가 나타났다. 

     

     

    오유누마 개천

     

     

    사실 차를 몰고 왔다면 오유누마 근처에 주차장이 있기 때문에 이곳까지 논스톱으로 도착했을 것 같다. 버스도 조금만 더 힘내서 여기까지 와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긴 하다. 그래도 고생하며 힘을 쓰다가 멋진 풍경이 나타났을 때 기운이 나는 경험은 도보로 걸어본 사람만 아는 감정이리라. 도로를 따라 조금 걷고 있자니 갑자기 넓은 공간에 터키석 빛깔의 호수가 나타났다. 그 주변으로는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고 곳곳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화산이 존재하는 우주 어딘가가 있다면 이런 풍경이지 싶었다. 온천수가 모여있는 호수기 때문에 물 위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고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수증기가 하얀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일본의 여러 화산지형들을 구경하러 다녔지만 이는 노보리베츠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 

     

     

     

     

    오유누마
    오유누마
    오유누마의 작은 화산
    오유누마 구슬 안에 담기
    오유누마

     

     

    경치에 압도되어 한참을 구경하고 있자니 해가 많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해가 일찍 지는 홋카이도였기도 한 데다 심지어 산자락이어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오후의 그림자가 매서웠다. 오유누마 옆의 오쿠노유를 잠깐 구경하고 그 옆의 전망대를 통해 지옥계곡으로 가는 코스로 이동했다. 계단도 잘 되어있었지만 어쨌든 등산로에 가까운 코스라서 선선한 날씨에도 등자락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카메라에서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떴다.

     

    '메모리가 부족합니다.'

     

    나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모리가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고 여분의 메모리는 가방의 무게를 덜어주고자 노보리베츠역의 코인로커에 털어놓고 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배터리였다. 5박 6일의 일정을 위해 2개의 배터리를 챙겨 왔는데 3박 차에 벌써 새 배터리로 교체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8박 9일의 일정이었어서 이번 6일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당시에는 카메라 RAW 파일 보정을 하지 않던 시절이라 저장도 JPG로만 했었고 그래서 배터리를 덜 먹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RAW+JPG 모든 방식으로 저장하게 해 두었는데 이것이 배터리를 훨씬 더 먹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3일 차부터는 배터리를 철저하게 관리하면서 쓰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배터리가 아닌 메모리가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마주하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아직 오유누마의 전망대 풍경이나 지옥계곡을 한참 더 찍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프리뷰를 보며 심하게 망친 사진들을 골라내어 지우기 시작했다. 사실 프리뷰를 보는 행위 자체가 카메라의 배터리를 소모하기 때문에 나는 두배로 초조해졌다. 그렇게 100여 장을 골라내 지우고 다시 산길을 걷다가 한번 더 메모리 부족 메시지를 보고 또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원래 잘 찍은 사진이던 아니던 모두 저장해 놓는 나에게 어떤 사진을 골라서 지운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당혹과 힘듦을 거듭하며 걷다 보니 지옥계곡이 보였다. 

     

     

     

    오유누마 옆의 작은 온천 오쿠노유
    오유누마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오유누마

     

     

     

    이쯤 되고 보면 나는 일본에서 지옥을 찾아다니는 인간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첫 도쿄 방문에서는 하코네의 오와쿠다니(별칭이 지옥계곡)에 갔었고, 이후 나가사키에서는 운젠지옥, 벳푸에 있는 7개의 지옥온천을 순례했으며 이 노보리베츠에서 다시 지옥계곡을 찾았다. 유황증기의 독성 때문에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벌거숭이 땅에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불지옥 같은 뜨거운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옛사람들이 지옥을 떠올린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코를 찌르는 유황냄새도 분위기를 더한다. 오랜 기간 분출된 증기 속의 유황성분이 돌에 들러붙어 곳곳에 노랗거나 초록색의 얼룩으로 남아있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 규모가 크다면 더욱 그렇다. 노보리베츠의 거대한 지옥계곡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생각을 하겠지만 아마 그중에 하나는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착하게 살아야겠군.'이 아닐까.

     

     

    노보리베츠 지옥계곡
    노보리베츠 지옥계곡
    노보리베츠 지옥계곡
    노보리베츠 지옥계곡
    노보리베츠 지옥계곡
    노보리베츠 지옥계곡

     

     

    다시 버스를 타고 노보리베츠역을 돌아와 열차를 탔다. 이제 홋카이도에서의 여행이 진짜로 끝이 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도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 더 이상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윽고 열차는 삿포로역에 도착했고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상당히 차게 느껴졌다. 지난 5일간 바람막이 점퍼 하나로 아무런 문제 없이 보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가 아니면 11월이 되고도 며칠이 지나서 그런가 갑자기 확 추워진 것이다. 애초에 홋카이도여행을 계획하면서 내가 들고 간 옷이 추워진 날씨를 커버하지 못하진 않을까 고민하긴 했었다. 그렇다고 두툼한 옷을 한벌 더 넣으면 안 그래도 버거운 짐이 버거킹짐이 된다. 그래서 우선 가진 옷을 껴입되 그래도 안 되겠으면 한 벌 사는 것으로 생각해 두었다. 현지조달은 여행의 꿀팁이다. 벌벌 떨면서 일단 숙소로 향했다. 스스키노에서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저렴한 도미토리식 호텔이었는데 가는 길에 저녁식사까지 해결할 요량이었다.

    홋카이도에서 유명한 음식을 들자면 양고기를 철판에 구워 먹는 칭기즈칸, 그리고 각종 야채와 고기를 넣고 국물이 자작하게 끓여낸 스프카레가 있다. 물론 다른 맛있는 음식점들도 많지만 홋카이도만의 특색을 느껴보자면 이 둘만한 것이 없다. 칭기즈칸을 먹는 것을 두고 꽤나 오래 고민했는데 거의 단벌옷에 가까운 여행자라 고기냄새가 배는 것이 좀 신경 쓰이기도 했고 양에 비해 가격이 센 편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언젠간 좀 더 넉넉한 여행도 해보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가성비를 따지는 과정까지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아무튼 그렇게 칭기즈칸을 포기하게 되고 스프카레만은 꼭 한번 먹어보자고 마음먹었다. 다만 홋카이도에서 5일 차가 되는 동안 도무지 시간을 내서 저녁을 먹을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는데 마지막 날 드디어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맞았다. 

     

     

     

    이날 저녁에라도 올라가봤어야 하는데 싶었던 삿포로 TV 타워
    귀여운 노면전차

     

     

    스프카레를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가게 중 하나인 스아게 플러스를 찾았다. 9시 30분까지 영업을 한다는데 8시 정도에 도착을 했는데도 이미 줄이 엄청났다. 가게는 2층에 있는데 1층 계단까지 사람들이 빽빽하게 줄을 서 있는 상황이었다. 1층 가게의 문 앞까지 북적거려서 그 가게 주인장은 짜증이 좀 나지 싶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밥을 먹으러 온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괜스레 주눅이 조금 들었지만 그래도 스프카레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그것을 이겨냈다. 한참 줄을 서 있자니 종업원이 음식 메뉴표를 대기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일본어 메뉴판이라 혹시 한국어나 영어가 없는지 물어봤더니 대답 없이 메뉴표를 회수해 갔다. 일언반구 없이 일어난 일이라 종업원이 화가 났나 싶었는데 잠시 뒤에 한국어 메뉴판을 들고 왔다. 바빠 죽겠는데 메뉴판을 또 들고 와야 하니 정신이 없긴 했겠지 싶었다. 이런 정도로는 나의 멘털을 흔들 수 없다. 게다가 잠시 뒤에 나를 자리로 안내해 주시는 분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가게에 대한 인상은 좋았다. 

     

     

     

     

    혼자 식사를 하는 손님들은 창문가에 난 자리로 안내를 해주는 듯했는데 다행히 양 옆에도 혼밥을 하러 오신 분들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치킨스프카레를 시키고 밥에는 치즈를 얹는 옵션을 더했다. 감자모찌가 별미라고 해서 그것도 같이 시켰다. 먼저 나온 것은 감자모찌였다. 같이 나온 생맥주와 함께 쫀득한 감자떡의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밥과 카레가 나왔다. 사실 나에게 카레란 꽤 오랜 시간 동안 오뚜기 삼분카레였다. 그러다가 부산의 모루식당이라는 곳에서 요리로 나오는 카레의 맛을 알게 된 이후로는 집에서 고형카레를 이용해 생크림까지 넣어 카레를 만들어먹는 등 점차 카레 입맛이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이날 스아게 플러스의 스프카레는 향신료의 내음이 은은하게 퍼지는 해장국을 한 그릇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쌀쌀한 날씨에 계단에 서서 힘들게 기다리던 그 시간들을 보상해 주는 따스한 맛이었다. 특히 피망, 감자, 당근 등 홋카이도산 채소들의 맛이 정말 좋았다. 가지를 정말 싫어하는 내게도 카레향을 듬뿍 머금은 촉촉한 가지는 예외적인 맛이었다. 맥주까지 마셔서 배가 터질 듯이 불러왔다. 살짝 알딸딸한 기분으로 숙소로 향했다. 카레와 맥주 덕분이었을까 몸이 조금 훈훈해져 있었다. 

     

     

    스아게 플러스 창가석
    치킨스프카레
    밥 위에는 치즈를 얹어보자

     

     

    사실 3년쯤 전에 교토에 다녀오면서 도미토리식 숙소는 이제 그만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이가 있어서 체력회복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결국 이번 홋카이도에서의 마지막 숙소도 도미토리였다. 어차피 누워서 자는 것이 전부인데 큰돈을 쓰기 아깝다는 생각을 계획단계에서 하지만 결국 넓은 곳에서 편하게 자는 것은 돈값을 한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느낀다. 여행지에서의 생각을 계획단계에서 깨달으면 참 좋은데 그게 쉽지가 않은 것이 나란 인간인 듯하다. 홋카이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숙소는 수건 하나 무료로 제공되지 않는 정말 저렴한 곳이었고 나무판자로 조립된 닭장 같은 2층의 칸들에 잠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첫날에 묵었던 숙소처럼 차라리 2층침대로 되어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저렴하다고 무턱대고 숙소를 잡은 나 자신을 잠시 한탄하던 찰나 카운터에서 만났던 직원이 내 칸으로 찾아왔다. 

     

    "카메라를 카운터에 두고 가신 것 같습니다."

     

    바우처와 여권을 꺼내기 위해 잠시 카운터 앞에 내려둔 카메라를 잊고 그대로 올라왔던 것이다. 일부러 들고 와준 정성과 그 친절한 표정이 정말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나에게 이 숙소는 꽤 괜찮은 숙소라는 결론으로 남았다. 설비가 부족해도 그것을 커버하는 친절함과 배려가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숙소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뜨끈한 물로 샤워까지 하고 나니 잠이 소록소록 왔다. 마지막 날에도 반나절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어서 계획을 세워둔 차였다. 엄청나게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짐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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