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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랜섬웨어와 함께한 12시간...
    그외에 함께하는 이야기 2016. 4. 27. 00:11
    이 내용은 실제상황을 각색한 것입니다.

    일기형식이라 반말로 진행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016년 4월 15일 저녁 9시경

    나는 스팸메일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혹시나 중요한 메일을 놓치고 지우는 일이 없도록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하자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지겹게도 쏟아지는 비아그라 시알리스 메일 속에 뭔가 낯익은 주소 하나를 발견했던 건 바로 그 때였다.

    interpal...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펜팔을 주고받았던 바로 그 사이트의 주소였다.

    잊은 지 오래된 주소라 뭔가 새로운 것이 있나 하고 들어갔지만 역시나 스팸이라 생각되는 내용 뿐.

    혹시나 했던 기대감이 우스워 뒤로 가기를 누르려던 찰나 잘못된 클릭 하나가 첨부파일에 가 꽃혔다.

    정말 의도치 않은 순식간이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손길이 익스플로러 창을 띄웠다가 꺼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별 일 아니라는 생각에 일단 하던 메일 정리를 마저 하기로 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작은 실수 하나가 하루를 나락으로 빠뜨릴 거대한 슬픔의 시작이었을 것이라고는...



    2016년 4월 15일 저녁 9시 30분 경

    메일 점검을 끝내고 이런저런 사이트를 둘러보다 익스플로러를 종료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뭔가 이상한 것이었다.

    '저런 파일을 바탕화면에 둔 적이 없는데?'라고 생각했을 무렵, 파일 제목이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de_crypt_readme.txt

    그리고 바탕화면에 두었던 pdf파일들에서 아크로뱃 마크가 없어진 것도 그때서야 알아차리게 되었다.

    파일을 확인해보니 어김없이 파일 뒤에 crypt라는 확장자가 붙어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crypt를 지우고 pdf 확장자로 전환을 하여 실행을 해 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나의 쿠크다스같은 멘탈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파스락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균열은 점차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2016년 4월 15일 저녁 9시 40분 경

    readme.txt파일을 읽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요즘 핫하다는 랜섬웨어에 나도 당첨이 된 모양이다.

    파일에 암호를 걸어 인질로 잡은 뒤에 돈을 보내야 해독코드를 보내준다는 바이러스였다.

    '비트코인 내놓으면 안 잡아먹지'라는 문구를 보며 나는 화면을 보여줬을 뿐인 무고한 모니터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펼쳐보였다.

    멀웨어같은 쓰레기 바이러스를 만들어서 돈을 타내려는 놈들은 분명 치질로 시작된 합병증으로 인한 패혈증 및 후유증으로 

    아주 오래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끝자락부터 모래처럼 부스러져 흩날리는 느낌이 들었다.

    C드라이브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대부분의 파일이 인질로 묶인 상태였다.

    C가 이런 상황이긴 하지만 아직 D드라이브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D드라이브에 있는 수만 장의 여행 사진들과 여행 동영상,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볼드모트와 같은 존재인 그 파일들을 지켜야 했다.

    제어판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 디스크관리자로 들어가서 D드라이브를 오프라인으로 바꾸는 작업 먼저 실행했다.

    V3는 뭐하고 있는 건지, 난 널 믿었던 만큼 내 백신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랜섬웨어에게 소개시켜줬고 그런 만남이...

    C드라이브의 바탕화면에 뭔가 살릴만한 파일이 없나 찾아보았지만 대부분 문서파일이라 crypt가 걸려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아도 방법이 없다고 한다.

    비트코인을 보낸다고 해도 해독 코드를 받지 못할 확률이 있다는 것.

    어차피 해독코드 100%라고 해도 그런 것들에게 내 피같은 돈을 보낼 순 없었다.

    그래 나는 포기가 빠른 남자지. 

    컴퓨터를 끄고 윈도우 재설치를 실행한다.

    심혈을 기울인 최적화 세팅이 날아가고, 작성하던 문서가 날아가고, 내 정신도 날아간다. 

    속에선 천불이 나고. 눈에선 레이져가 나고, 가슴에선 눈물이 난다. 



    2016년 4월 15일 저녁 10시 경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려 애를 써 보았지만, 겉은 그랬는지 몰라도 속은 그렇지 못했나보다.

    32비트 윈도우를 깔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포맷을 하고 64비트로 설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범죄자 녀석을 죽일 수만 가지 방법이 머릿속에 다양하게 떠오른다.

    손가락부터 1mm씩 채칼로 슬라이스를 치는 형벌부터 시작해서 항문에 마데카솔을 발라 새살이 솔솔 돋아 

    막혀 죽게 하는 방법까지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간신히 윈도우를 설치하고 D드라이브에 들어가 보니 가관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십 수 년간 모아둔 각종 미디어파일들, 그리고 최근 여행책을 만들어 보겠노라며 

    50페이지쯤 완성했던 포토샵 원본 psd파일들에 모조리 crypt가 걸려있었다.

    괜찮다. 만드는데 1년 정도밖에 안 걸렸더랬다. 이 금니 빼고 다 씹어 먹을 해커놈들...

    피해현장을 둘러보며 지울 것은 지우고 백업본이 있었는지 찾아보는 등의 작업을 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겨우 이렇게 날리려고 아등바등 파일들을 모아왔단 말인가.

    인생사 공수래공수거, 모든 것은 한 순간의 집착일 뿐이었단 말인가.

    한낱 봄날의 꿈이었단 말인가.

    몸에 사리가 한 방울 더 생기는 기분이다. 



    2016년 4월 15일 저녁 10시 30분 경

    원래 아름다운 연꽃 같은 미담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오르는 법이다. 

    정말 짜증이 바글거리는 상황 속에서 나는 한 폴더를 보고 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보라 저 경계면을!

    crypt로 암호를 걸다가 더 이상 처리하지 못한 저 모습을!

    그나마 나의 발 빠른(?!) 대처로 인해 D드라이브를 오프라인으로 바꾼 것이 주효하여 사진파일 중 4904까지만을 암호화 하고

    그 뒤에는 손을 못댄 바로 그 치열했던 현장을...

    2TB가 되는 D드라이브 데이터베이스에 모든 파일을 암호화를 하려고 했겠지만 한 순간에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순차적으로 진행이 되던 와중에 내가 선수를 친 증거사진 되시겠다.

    저 순간을 막지 못했더라면 문서파일과 압축파일 정도로 끝난 지금의 재앙이 

    나머지 모든 파일에 미쳐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온다. 

    나의 기지로(?!) 최악의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다.



    2016년 4월 15일 저녁 11시 30분 경

    복구 작업을 하는 와중에 나는 1주 전에 SSD를 교체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SSD는 포맷을 한 상태로 서랍 안에 잘 모셔두었다.

    외장하드 케이스를 사서 대용량 메모리처럼 쓸 계획이었다.

    외장하드 케이스는 저 멀리 중국에서 차이나포스트에어메일을 타고 날아올 것이고, 그 기간은 약 1달 정도로 추정된다.

    그 때까지 봉인의 의미로 서랍에 쟁여두었던 것인데, 이것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ecuva라는 데이터 복원 프로그램을 굴렸다.

    어디까지 살아날지 모르겠지만, 나와 수년을 동고동락한 전우를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어떠한 귀차니즘도 감수할 생각이다.



    2016년 4월 16일 오전 2시 30분 경

    불행 중 다행으로 복구 프로그램을 통해 각종 암호를 담아두었던 텍스트파일을 살려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좀 더 건질 것들이 있었고, 힘들었던 이 시기에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생고생에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내 문서파일 하나.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작성해 온 그 파일이 없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주기위해 만들었던 워드 문서 파일이었다.

    고백했다 차인 이후로 한 동안 열어보지 않은 파일이긴 했지만, 그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를 잃었다.

    이제는 진짜 그녀를 잊어야 할 때인가 보다.

    인생은 기억과 망각을 번갈아가며 하는 법이다.

    새로운 인연을 기억하려면 지난 인연은 잊어야 하겠지.

    안녕이다, 나를 버린 나쁜 사람, 나도 이제 진짜 너와 이별인가보다.



    2016년 4월 16일 오전 10시 경

    데이터 복구를 하느라 늦게 잠들었던 여파로 늦잠을 자고 말았다. 

    그래도 정말 중요한, 다시 만들 수 없는 파일들의 대다수가 살아있기 때문에 두발 뻗고 잠을 자는데 까지는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10년 넘게 모아온 사진 파일들을 미리 백업해 둔 것이 아주 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상황은 대단했다.

    뭐 그래도 어찌어찌 다시 구해보면 구해질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너무 아쉬워하고 있지만은 않기로 했다.

    이리저리 조사해 본 결과 이런 종류의 랜섬웨어는 파일 속성을 읽기전용으로 하면 문제가 없다고도 한다.

    사진이나 중요 동영상, 문서 등은 따로 지정하여 모아놓고 읽기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역시나 한 발 늦은 교훈이 생겼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는데, 정상화되려면 아직도 2~3일은 더 걸릴 것 같다.

    파일의 손실도 손실이거니와 시간도 많이 잡아먹는 랜섬웨어다.

    다시 한 번 그 제작자들의 혹독한 질환과 인생 막장 테크를 기원하며 글을 마무리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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