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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4일차 Final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16. 11. 26. 14:50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헤이!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시즈오카 마지막날 여행기
시작합니다!
시즈오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후 2시 10분에 시즈오카역에서 떠나는 공항 버스를 탑승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4일차의 일정은 그 안에 끝나야만 하는 타임어택같은 것이었다.
물론 시즈오카역에서 가급적이면 가까운 곳에 있는 관광지면 더 여유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4일차 일정은 오전중에 니혼다이라와 쿠노잔 도쇼구(구능산 동조궁)을 보는 것으로 정했다.
<4일차 일정>
3일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보여주었던 후지산-시즈오카 관광티켓의 효력이 다했기 때문에 이제는 모두 현금 박치기로 다녀야했다.
가급적이면 교통비를 줄여보고자 생각한 것이 바로 호텔 셔틀버스를 이용해보자는 것이었다.
니혼다이라 호텔은 내가 가려던 니혼다이라 옆에 위치한 곳으로 드라마 촬영을 할 정도로 풍광이 좋은 곳이다.
호텔 정원에는 넓은 풀밭이 있고, 그 너머로는 시미즈항의 풍경과 후지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건물에서 식사나 다과를 하면서 대형 유리창을 통해 펼쳐지는 풍경이 아주 진풍경이라고 했다.
이 호텔은 시즈오카역에서 출발하여 히가시시즈오카역을 지나 호텔에 도착하는 셔틀버스를 1일 10회 운행하고 있다.
첫차는 8시에 시즈오카역에서 출발하는데, 타고 올라가는 것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니혼다이라 호텔에서 식사를 하거나 커피라도 한잔 한다면 내려오는 것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일반 버스를 이용해도 왕복 1060엔 정도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호텔 셔틀버스를 이용하고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판단되었다.
도미인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이제는 묵직해진 캐리어를 끌며 시즈오카역으로 갔다.
캔맥주 등이 빼곡히 들어찬 캐리어를 끌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시즈오카역의 코인락커에 잠시 맡겨두기로 했다.
이제는 넉넉해진 동전이 있어서 첫날의 당황스러웠던 사건의 재연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셔틀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니 버스기사님이 문 밖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의외로 이른 시간인데 두 사람이 먼저 타고 있었다.
<카케가와역>
마지막 날의 날씨는 '오전에 흐리고 오후에 화창하게 갬' 이었다.
오전중에는 풍경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비까지 조금씩 오고있어 당혹감을 더했다.
후지산은 전날 잘 감상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했다.
의외로 대단히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버스는 40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를 호텔 로비 앞에서 내려주었다.
<니혼다이라 호텔 식당>
건물 안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어둑어둑한 로비에 놀랐는데, 내가 인터넷에서 찾았던 장면이 그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3층 정도는 되어보이는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어 그 앞에 잘 다듬어진 정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내가 보았던 홍보물에서는 그 너머로 펼쳐진 스루가만과 후지산의 모습이 있었지만, 내 눈에는 안개가 가득할 뿐이었다.
대충 예상은 했던 것이라 빠르게 단념을 했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먹은 것이 없었던 나는 아래 조식 뷔페에서 솔솔 풍기는 고기굽는 내음에 몸이 달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호텔 조식이 먹어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아끼고 아껴서 남은 돈이 좀 넉넉하기도 했고, 이럴때 아니면 언제 고급호텔 조식을 먹어보겠으며,
셔틀버스 값을 치른다고 생각하면 좀 비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여러가지 생각이 있었지만, 결국 그냥 고기가 먹고 싶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3,200엔이나 하는 호텔 조식을 먹고 있자니 내가 뭐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시즈오카에 여행차 왔다가 묵은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가볍게 오믈렛을 먹고 커피 한잔을 하며 하루를 계획하는 그런 이미지.
하지만 실상은 누가봐도 무거워보이는 카메라가방에, 베이컨을 몇 줄을 먹어야 뽕을 뽑는지 계산하고 있는 소시민이었지만.
언젠가 이런 호텔에 묵어도 괜찮을 정도로 삶이 넉넉한 시간이 오면, 그때는 방을 잡고 해가 지는 모습까지를 눈에 담아보고 싶은 소망이다.
<니혼다이라 호텔>
<니혼다이라 호텔 조식>
부른 배를 두드려가며 열심히 조식을 섭취하고 호텔 앞 정원에 나가보았다.
아직 빗방울이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다.
산책로같은 것이 보였는데 거기까지 가려면 풀을 밟고 지나가야만 했다.
뽀송할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철벅거리며 발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만 조용히 찍다가 다시 호텔 반대편으로 나왔다.
<니혼다이라 호텔 앞 정원>
<니혼다이라 호텔 정경>
호텔에서 약 5분 정도 걸어가면 니혼다이라 공원이 나온다.
높이는 사실 300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 언덕은
넓게 펼쳐진 시미즈항과 스루가만, 그리고 그 배경으로 후지산까지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가 오는 평일의, 발길 닿기 쉽지 않은 구석진 산 속의 공원이라서 였을까?
이날도 나는 아무도 없는 공원을 전세내고 홀로 마음껏 돌아다니고 있었다.
미끄러운 벽돌 바닥에 놀라 살살 공원을 걸어다니고 있자니 왠 동상 하나가 나왔다.
원피스를 입은 작은 소녀가 일본 전통 복장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손을 맞잡은 형태의 동상이었다.
내용은 몰랐지만 분위기만으로 보았을 때 따듯하다기 보다는 슬픈 느낌이 있었다.
확인해보니 이는 일본 동요 '빨간 구두'의 주인공인 모자상이라고 했다.
시즈오카 출신의 주인공인 이야기를 기리며 만든 모자의 이별을 그린 동상이다.
<빨간 구두 동요 동영상>
뭔놈의 동요가 이렇게 칙칙하고 슬픈 멜로디로 점철되어있는지 모르겠는데, 가사도 만만치 않다.
赤い靴 履いてた 女の子
빨간구두 신은 여자아이
異人さんに連れられて行っちゃった
외국인을 따라가 버렸다네
横浜の 波止場から 船に乗って
요코하마의 부두에서 배를 타고
異人さんに連れられて行っちゃった
외국인을 따라가 버렸다네
1922년에 우조 노구치가 쓴 시에 나가요 모토리가 곡을 붙인 이 동요는 사실 실화에 기반하고 있다.
시즈오카 후시미라는 곳에 이와사키 키미라는 여자아이가 살았다.
키미의 어머니 이와사키 카요는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다가 북해도로 넘어가 시로우 스즈키라는 사람과 결혼한다.
당시 일본은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로 소련에 가까운 북해도에 공동농장이 들어서는 등의 일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모두가 부유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도착한 북해도의 공동농장은 너무나 가혹한 환경이었다.
카요는 시아버지인 사노 야스요시의 권유로 결국 딸인 키미를 미국 선교사인 휴잇 부부에게 입양하게 된다.
그러나 휴잇 부부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키미는 결핵에 걸린 상태라서 데려갈 수가 없었다.
결국 키미는 도쿄 아자부에 있는 토리카즈 교회라는 고아원에 맡겨지고, 9살의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우조 노구치는 사회주의 소설을 집필하던 사람으로 당시 삿포로에서 같이 신문사 동료로 일하던 시로우 스즈키와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들은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 동요가 된 것이라고 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인 1973년 키미의 의붓동생인 소노(시로우 스즈키와 이와사키 카요의 셋째 딸)가 빨간 구두의 실제 인물이 자신의 언니임을 밝혔다.
1978년에 북해도 텔레비전 방송국의 리포터였던 히로시 키쿠치가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5년간 자료를 모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책을 내기도 했다고.
<알고 보면 슬픈 이야기를 담고있는 니혼다이라 빨간구두 모자동상>
니혼다이라에서 가장 조망이 좋다고 알려진 곳에 도착을 했더니 과연 조망이 엄청났다.
구름으로 가득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이런 풍경을 보려고 새벽부터 이 난리를 쳤나 자괴감이 들었다.
곧바로 언덕 너머에 있는 로프웨이 정류장으로 향했다.
<니혼다이라 표지석>
본래 니혼다이라와 구능산은 연결된 곳이었다고 한다.
여러 세월에 걸쳐 침식작용이 일어났고, 특히 무른 편이던 중간부분이 매몰되면서 구능산은 고립된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로프웨이가 아니면 니혼다이라 방향에서 접근하기는 좀 어렵고 반대쪽인 스루가만쪽을 통해 올라오는 정도가 가능하다.
대신 1159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 부담이 있다.
로프웨이 정류장은 니혼다이라 파크센타라는 이름의 기념품 판매장과 함께 있었다.
뭐가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을 기약하며 우선 곧바로 도쇼구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티켓을 끊으러 들어가는 길에도 역시 사람이 없었다.
로프웨이는 그래도 간격이 길지 않아서 금방 탑승할 수 있었다.
처음에 혼자 타고 가게 되는건가 하고 두근두근했었지만 곧이은 일단의 사람들의 출현으로 그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니혼다이라 로프웨이 정류장>
<로프웨이 탑승로>
기본적으로 쿠노잔 도쇼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곳이라는 점을 의식하니 곳곳의 도쿠가와 가문 문양이 쉽게 눈에 띄었다.
세잎 접시꽃을 형상화했다는 도쿠가와 가문의 문양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 시스템에서 엄청난 영향을 발휘했을 것이다.
슨푸성에서도, 슨푸 로망버스에서도, 센겐신사에서도, 그리고 이곳 도쇼구에서도 그 문양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로프웨이 내부 천장에도 두 개나 그려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로프웨이 내부 모습>
<안개속의 로프웨이>
<로프웨이 탑승>
<로프웨이>
안개속을 뚫고 지나가는 로프웨이 속에서 맞은 편의 로프웨이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탑승한 칸이 검붉은 색의 조합이었다면 건너편의 것은 황록색의 조합이었다.
검붉은 색의 차량은 영주님 가마를 형상화 한 것으로 이름은 아오이호, 황록색 차량은 공주님 가마를 형상화한 것으로 다치바나호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2007년 개업50주년을 맞아 포장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인 2015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후 400년을 맞아 이런저런 행사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차량 내부에도 400이라는 숫자가 적혀있기도 했다.
본래 이 로프웨이에서 바다와 산의 하모니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은 점은 좀 아쉬웠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유리창 너머로 안개만이 가득히 차올라 있을 뿐이었다.
풍경은 포기하고 문화재 위주의 관람을 해야겠다고 이때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공주님 가마>
<비오는 구능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6년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다.
하나는 장사를 구노잔에서 지내라는 것, 그리고 이후 닛코에 작은 사당을 지어 옮기라는 것이었다.
(닛코 도쇼궁이 작지 않은 것으로 보면 유언을 따르지 않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무덤은 구노잔과 닛코 두 곳에 있다.
닛코 도쇼구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유해를 처음 보관했다는 점과 전국에 있는 도쇼구의 총본궁이라는 점에서 한 번 볼만하다.
지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조금씩 내리는 비가 땅을 적셔 바닥이 미끌미끌했다.
도쇼구는 계속 올라가며 관람하는 구조로 되어있는데다, 계단이 완만한 느낌이 아니라서 걷는데 제법 애로사항이 있었다.
입구에서 지팡이를 대여해주는데, 세상에 괜히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남의 무덤에서 사망유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므로 발걸음을 더욱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쿠노잔 도쇼구>
도쇼궁의 초입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도장이 있다.
그 시절에 손바닥을 찍어놓은게 아직도 남아있나 싶어 신기하기도 했다.
38세의 이에야스는 신장은 155cm에 몸무게 60kg이었다고 하고 손바닥도 나와 비슷한 크기였던걸로 봐서는
지금 기준으로는 꽤나 왜소한 느낌의 장군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서도 살집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던 것이 생각나, 첫날 슨푸성에서 보았던 위풍당당한 동상과는 위화감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작고 동글동글한 이미지의 캐릭터로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손도장>
<쿠노잔 도쇼구>
<도쇼구 석등>
<쿠노잔 도쇼구>
일본 신사에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술통이다.
쿠노잔 도쇼구에서도 어김없이 술통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무슨 의미인지 전부터 궁금해하다가 이번에는 작정하고 찾아보았다.
일본이 다신교를 믿고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신도라 부르는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신토사상에서 신과 접근할 수 있는 방편으로 술이 빠질 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케 제조장에서 술이 잘 빚어지기를 기원하며 신사에 술통을 헌납하는 일도 있고
신사에서 축제 등의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술을 기부받는 일도 있다.
신께 바쳐진 술 자체는 오미키(신주)라고 하며 이를 마시면 신의 가호가 내린다고 믿는다.
사실 밖에 쌓여있는 것은 전통방식의 삼나무 술통인데 카자리다루(장식통)라고 해서 술은 들어있지 않다고 한다.
<오미끼>
<도쿠가와 이에야스 무덤 앞 마지막 계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
<도쿠가와 문양이 새겨진 석등>
죽은지 400년이 지났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은 그 세월의 흐름이 참으로 무상함을 보여주었다.
에도시대 최고의 권력자도 잠이들고 시간이 지나면 이토록 깊은 자연속에 서서히 묻혀가는 것이 아닌가.
깨지고 이끼가 잔뜩 낀 석등과, 녹슬어가는 무덤의 모습에서 갑작스레 칼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태양계를 벗어나던 보이저호가 마지막으로 지구를 찍었을 때 광활한 우주에 박힌 창백한 푸른 점 하나로 보이더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그 창백한 푸른 점에 한 시대를 풍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똑같이 잠들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첫 번째 묘>
<도쿠가와 이에야스 묘 자물쇠>
<도쇼구 지붕>
도쇼구의 전체적인 모습은 검붉은 색의 기둥에 진녹색의 지붕, 그리고 화려하게 꾸민 금색의 장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붕의 수막새마다 도쿠가와의 문양을 새겨놓은 것이 퍽 인상깊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투머치한 디자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일부 이해가 가기도 한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꽤 마음에 들긴 했지만 말이다.
건물의 외관에 더해 곳곳에 새겨진 조각들과 그림들 또한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의 실력이라는 점에서 찬사가 터져나온다.
내게 이런 그림을 이해하고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지식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어느 것 하나 그냥 그려지고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도쇼구 그림>
<도쇼구 도쿠가와 문양들>
<카자리다루>
<도쇼구>
도쇼구의 누문에서 수호신상이 서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일본 역사속 인물에서 낯이 익은 사람이 별로 없는데 누군지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떠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한국에 돌아온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개그콘서트를 보다가 깨달았다.
예전 '고집불통'에서 경비아저씨로 나오던 '임우일'씨와 닮았던 것이다.
<도쇼구 누문 수신상>
<개그맨 임우일>
<도쇼구 오르는 길>
도쇼구에서 나와 바닷가쪽을 보고 있자니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물들이 있었다.
해변을 따라 점점이 늘어선 방파제였다.
아마도 지진에 이은 쓰나미를 막아보고자 생긴 구조물이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스루가만에 접한 시즈오카는 여러개의 판이 겹치는 곳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지진의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도 언젠가는 시즈오카에서 엄청난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니 그들의 걱정을 알 법도 하다.
이렇게 잔잔한 바다가 모든 것을 삼키는 무서움으로 돌변할 수 있다니 아무래도 관광객의 마음과 현지 주민의 마음이 다른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쿠노잔에서 본 스루가만>
<도쇼구 박물관>
<스루가만쪽 출구>
스루가만을 통해서 동조궁으로 오르는 길은 1159개의 계단으로 되어있다.
이 길을 오모테산도(表参道-표참도)라고 하는데 사실 이 이름을 하라주쿠의 오모테산도힐즈로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지명인줄 알았다가 아닌가 싶은 마음에 무슨 의미인지 찾아봤더니 신사에 이르는 참배길을 오모테산도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하라주쿠의 오모테산도는 메이지신궁에 이르는 길이고 이 곳의 오모테산도는 동조궁에 이르는 길이었던 것이다.
사실 여행 중에 알게 되는 지식도 있지만 집에 와서 여행기를 작성하며 알게 되는 지식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여행기를 적으면 그 숨은 행간의 의미를 찾는 세 번째의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구불구불 계단이 이어져 있는데 조금 내려가볼까 하다가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카메라도 놓치고 가방도 흙투성이가 되는 그 순간에 순간 주마등이 스쳐지나갔다.
이에야스와 악수를 할락말락 하는 차에 4m쯤 미끄러진 곳에서 간신히 멈춰 앉을 수 있었다.
다행히 주변은 사람 하나 없는 곳이라 얼굴이 팔일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돌계단은 비가 오거나 습한 날에는 피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스루가만 방향 계단>
<쿠노잔 도쇼구 영주님 가마>
<연인의 성지 니혼다이라>
다시 로프웨이를 타고 돌아와 특산품 판매장을 방문했다.
이런저런 상품들고 가득한 와중에 내 눈에 띈 것은 와인병처럼 생긴 음료수 병이었다.
시즈오카 멜론 머스크 사이다라고 쓰인 그 병을 보고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사실 시즈오카에서 멜론과 관련된 제품을 사먹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작가 '이상'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오감도, 날개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그를 주인공으로 한 '경성탐정 이상'이라는 소설을 읽고난 뒤
나는 그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다.
본명은 김해경인데 일본인들이 이씨인 줄 알고 '이상' 하고 불렀던 것을 호처럼 써서 이상이라 불리게 되었다던가
총독부 건축기사로 일하다가 병이 걸려 그만 둔 이력 등은 수능시험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작품의 난해함도 인물의 생애를 먼저 들었다면 이해가 갔을텐데 그 시절엔 왜 그저 달달 외우기만 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이상이라는 작가의 생애 마지막이 퍽 비참하다.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에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보려 했지만, 실망만 가득 안은 채 햇빛도 들지 않는 싸구려 방을 얻어 은거를 시작했다.
사상불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폐병이 심해 한 달만에 석방되었지만 결국 동경제대 부속 병원에서 사망하게 된다.
임종 전에 '레몬향이 맡고 싶다.'고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후에 아내였던 변동림은 '멜론이 먹고 싶다.'고 했다고 서술한바 있다.
당시 도쿄의 고급 과일가게인 '센비키야'에서는 서양 과일의 대명사인 멜론을 팔고 있었는데
이는 시즈오카에서 공급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나는 멜론 머스크 사이다를 뜯어 허공에 건배하며, 타지에서 쓸쓸히 죽어갔을 천재 작가 이상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시즈오카 머스크 멜론 사이다>
<니혼다이라 고양이>
<니혼다이라>
4일차 계획된 일정이 생각보다는 빠르게 모두 종료되었다.
이제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시즈오카역으로 돌아가 공항버스에 몸을 담으면 될 터였다.
중간에 좀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남은 쇼핑들을 해치울 요량이었다.
버스를 타러 니혼다이라 호텔로 걸어가고 있는데 왠 여자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깨가 파인 조금은 화려한 복장의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팜플렛의 녹차밭 사진을 보여주며 이 곳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나도 외국인이라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우물쭈물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나에게 곧바로 영어로 질문을 해온 것으로 보아서 일본어를 잘 못하나 싶어 잠깐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바로 옆의 주차장에서 차량 안내를 하고 계시던 분께 '이런 곳이 근처에 있나요?' 하고 여쭈니 방향을 알려주며 10분이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오래 걸리는 곳이면 통역만 해주고 내 갈길을 가려고 했었는데,
10분 정도라면 아직 버스시간도 남아있고, 뭐라도 하나 더 보면 좋고 하니 나도 한 번 가보고 싶어졌다.
내가 따라가도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니혼다이라 녹차밭>
하늘을 더듬으며 본인을 이렇게 에어(AIR)라고 부르면 된다고 하던 그 여자분은 태국에서 온 여행객이었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여행객들의 특징 중 하나가 의외로 유쾌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시즈오카에 게스트하우스가 마땅치 않아서 개인실을 쓰는 숙소를 이용하는 바람에
다른 여행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할 일이 도통 없어서 아쉬움이 컸었다.
마지막 날에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된 듯 하여 대단히 즐거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녹차밭을 찾았는데, 사진과는 다른 풍광에 큰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에서는 녹차밭 너머로 후지산이 멋들어지게 반짝이고 있었는데, 우리가 본 곳은 안개만 가득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오후가 되어가고 있는데 날이 갠다던 일기예보는 어찌 된 것이냐며 같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다시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날씨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파란 구멍이 점차 커지더니 구름을 순식간에 몰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산을 볼 수 있나 없나 감질나는 시간을 견뎌내다가 시계를 보니 호텔 셔틀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되어있었다.
<니혼다이라 녹차밭>
쇼핑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좋은 사람과 좋은 풍경을 공유하는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과감하게 셔틀버스를 포기하고 니혼다이라에 한 시간을 더 눌러앉기로 했다.
솔직히 조식을 먹은게 좀 아깝긴 했지만, 그 이후에 펼쳐지는 풍경은 그것을 모두 만회하기에 충분했다.
스루가만의 너머로 허리에 구름을 두른 후지산의 당당한 모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계획대로만 했다면 알지 못했을 풍경이다.
가끔 인생은 계획하지 않은대로 흘러갔을 때 더 멋질 수 있다.
<구름이 걷힌 니혼다이라-후지산>
<니혼다이라 - 후지산>
<니혼다이라 - 후지산 - 시미즈항>
<니혼다이라 송신탑>
그렇게 시즈오카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흥분과 기쁨 속에서 보내고 에어양과 함께 시즈오카역으로 돌아왔다.
잠시의 만남이 제법 즐거워서 헤어짐이 아쉬웠지만, 아무리 무계획이라고 해도 비행기 시간을 어길 수는 없었다.
페이스북 주소를 교환하며 뒷 날을 기약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살아있다면 언젠가 한번은 더 볼 일이 있겠지.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그녀를 조금은 부러워하며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시즈오카역에 심어놓은 캐리어를 찾고, 첫 날 임대했던 닌자 wifi를 반납했다.
그동안 줄기차게 사용하던 와이파이가 끊기자 이제는 버스를 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된 것 같았다.
<시즈오카역>
<시즈오카 공항>
<시즈오카 공항>
후지산의 여신은 소원을 잘 들어주는 편인 듯 하다.
얼굴 한 번 보여달라고 한 이후부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 꾸준히 그 독특한 자태를 보여주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노을에 걸친 후지산이 나의 안전한 귀가를 빌어주고 있었다.
1시간 반 후 비행기가 착륙하며 그렇게 여행은 끝이 났다.
<귀국길의 후지산>
<귀국 비행기에서 후지산 - 동영상>
여행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마음에 아쉬움과 우울함이 가득하다는 것.
그것은 그 여행이 엄청나게 즐겁고 행복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평소보다 짧았던 3박4일간의 시즈오카 여행은
약간의 여행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내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 좋은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시즈오카 여행을 하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 곳엔 후지산같은 웅장한 풍경도 있고, 시라이토 폭포같은 신비로움도 있고
영어는 못하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그러니 시간이 비어서 가는 곳이 아닌, 시간을 내서라도 가봐야 할 곳이라고.
시즈오카 여행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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