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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큐슈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1일차
    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17. 10. 8. 21:59

    또 다시 휴가를 일본으로 가겠다는 나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요즘 군함도나 위안부 건으로 떠들썩 한데 굳이 일본을 여행하는 이유가 뭐냐?"


    물어본 자리에서는 대충 생각나는데로 대답해버리고 말았지만, 나는 그 질문을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다. 나도 대한민국의 아들이다.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해 울분을 토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일본 정치인들의 독도 도발이 어처구니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방사능이 무섭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본을 자주 찾게 되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내가 성장하면서 경험한 일본 문화에 대한 확인의 의미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이 즐길 수 있는 문화컨텐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일본 문화에 그 주류를 두고 있음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그런 문화를 누리고 살아온 사람에게, 그 문화의 원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더해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서적으로는 멀지만 지리적으로는 꽤나 가까운 나라이고, 그래서 저렴하게 왕복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경제적 이점 또한 무시하기 어렵다. 여행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귀한 휴식시간과 돈을 써가며 무언가를 보고 느끼기 위한 의식이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저렴한 돈으로 다양한 것을 해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경제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성이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고정비용인 항공권이 저렴하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있다. 왕복 이동 시간이 적게 걸린다는 점도 포함해서 경제적이다.


    그렇다면 이 여행이 결국 자기만족만을 위한 것이고 그 이외의 성과랄만한 것은 없냐고 한다면 그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저자 유홍준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사건으로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던 기존의 세대와 달리 현재의 세대는 자유로이 서로의 나라를 왕복하며 문화 교류를 이뤄내고 있다고. 바람직한 한일 관계는 서로를 미워하여 물고 뜯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큰 그림에서 서로의 상생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나는 일본에서의 여행에서 '나'라는 사람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만나는 일본인이 나를 통해 한국을 바라보고 느끼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한국에 괜찮은 이미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여행자로서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다. 


    일본의 현재 지도자는 '아베 신조'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꿈꾸고 있는 것처럼 보여 주변국들의 우려를 사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본 시민 전체가 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정권의 시민이었다고 해도, 그 정권의 기치에 공감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말이다. 분명 일본에서도 강제징용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관련 기록을 찾아주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이 좋아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있고, 한국 드라마에 반해 팬클럽을 결성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일본을 여행하며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었을 때 중립의 입장에 서 있던 일본 사람들에게 한국인에 대해 조금이나마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면, 한국과 상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는 셈이며,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일본에게 원하던 사과를 비롯한 많은 일들이 보다 쉽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초석이 되리라 생각한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지만, 위와 같은 다양한 이유로 나는 일본을 여행한다. 여행이 즐거웠기에 나는 다시 일본을 찾고, 다시 찾은 일본에서도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것이다. 




    2017년 한국의 여름은 꽤나 무더웠다. 태양이 따가울 정도로 살갗에 박혀들어왔고 습도도 만만치 않았다. 보통 이런 날씨에는 '피서'라고 하여 더위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날이 더울 때 더운 곳에 가야 그 곳의 진짜배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점에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있지만, 사람은 겪어보기 전에는 그 바보같은 생각을 좋은 생각이라 믿곤 한다. 그래선 나는 8월 마지막 한 주를 남큐슈에서 보내기로 했다. 제주도보다도 훨씬 남쪽지방인 셈이었다.


    앞선 다섯 번의 일본 여행을 통해 내겐 여행 준비를 하는 하나의 프로토콜 같은 것이 생겼다. 우선 모든 것에 우선하는 항공권의 예약이 이뤄진다. 이때 왕복 항공권의 출국과 귀국 사이의 기간이 여행의 길이가 되는데, 가급적 길수록 좋고, 표값이 싸면 좋다. 이 둘을 잘 만족하는 일정이 잡히면 비로소 여행 준비가 시작된다. 이때부터는 정보전이다. 해당 지역에 볼 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블로그와 여행 책자 등을 통해 확인하고 수집한다. 그런 뒤 구글 지도에서 해당 볼거리들의 위치를 확인하며 동선을 파악한다. 그러면 가까운 곳들에 있는 것은 같은 날 묶어서 볼 수 있게 되고, 관람 시간 등을 따지다 보면 하루에 어디까지 볼 수 있겠다 싶은 감이 온다. 그러면 지역별 숙박 일수를 결정하고 호텔스닷컴 같은 곳에서 최저가 호텔을 찾아본다. 마지막으로 일본 교통의 특성상 1일권 같은 패스권을 쓰는 것이 경제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패스의 유무, 어떤 패스가 효율적일지 등을 고려하여 미리 구입이 가능하다면 인터넷 등으로 사놓는다. 




    <계획표 PPT 표지>



    <계획표 1일차>



    사실 위와 같은 치밀한 준비 과정은 '같은 가격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싶다.'는 나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다. 덕분에 자꾸 욕심이 생겨서 여행이 고행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생각해보면 처음 도쿄로 여행을 갔을 때가 가장 여행자다운 여행자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여행 책 두 권을 딸랑 읽어놓고 정말 가고 싶은 곳 리스트만 한 열개 쯤 골라놓은 뒤 캐리어도 없이 배낭 하나 덜렁 메고 떠났던 그 첫 여행. 와이파이나 로밍 같은 것도 하지 않아서 구글지도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 돌아다녔던 기억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길을 묻고 길을 잃던 기억이며, 30분씩이나 되는 길을 함께 찾으며 걸어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기억이다. 그래서 그 첫 여행의 뜨겁고 따뜻했던 감정을 다시 느끼고자 나는 또 다시 짐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여행은 한 달이 넘게 남아있어서, 대략적인 계획표를 짜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그저 가끔씩 내가 적어놓은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면서 계획을 다시금 곱씹어 볼 뿐이었다. 이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긴 방황에 마침표를 찍고 미래를 향한 도전을 곧바로 시작할 계획이어서 더더욱 이번 여행은 소중했다. 자꾸 계획을 들여다 보는 와중에 보고 싶은 곳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더니 마침내는 시간이 모자라 둘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시간을 정말 분단위로 쪼개어서 틈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나를 고민하게 했던 것은 '석탄 기관차를 타느냐'와 '돌고래를 보러 가느냐' 였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겠지만, 석탄 기관차를 타본 지금으로썬 '돌고래를 보러 갈 걸...'하는 마음이 크다. 가지 못한 길은 이리도 빛나보이던가.






    <출발 전날 꾸린 짐>




    오랜 기다림 끝에 여행 출발 당일이 되었다. 매번 새벽같이 출발해야 했던 비행기 스케줄이었는데, 이번에는 점심께쯤 출발하는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전날 미리 정리해둔 캐리어를 들고 카메라와 렌즈가 든 묵직한 백팩을 뒤로 메니 비로소 고행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집 밖으로 나와보니 비가 철철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 하나가 내 눈에는 탁구공만하게 보일 정도였다. 근래 보지 못했던 묵직한 폭우였다. 우산을 써도 소용없이 비가 들이쳐 결국 가방과 캐리어가 홀랑 젖고 말았다. 나 하나 젖는것은 상관 없는데 습기에 약한 카메라가 젖을까봐 계속 노심초사했다. 공항버스가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정도밖에 안되지만 비를 맞고 걸어갈 수 없어서 버스를 타야만 했다. 출근 피크 시간은 피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 캐리어를 들고 타는데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내릴 때도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여행 시작부터 비와 피로에 젖어들고 있었다. 






    <비맞는 공항버스>





    공항버스를 탑승하고 나니 이제는 도착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여행계획을 곱씹어보며 마음 편하게 가려던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진 것은 교통체증때문이었다. 11시30분까지 넉넉하게 도착해서 발권과 수속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비가와서 다들 차를 몰고 나오셨는지 도로 상황이 엉망이었다. 평소같으면 5분만에 주파할 거리를 30분이 걸려서야 도착하게 되자 나는 시간적으로 쫓기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12시 20분이 지나면 발권 자체가 안되는데 그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없을지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조바심을 낸다고 버스가 빨리 가는 것이 아닌데도 몸이 달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결국 공항에 도착한 것은 12시 5분이나 되어서였고, 발권 카운터에 부리나케 뛰어가 보았지만 다른 비행기 탑승객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15분 안에 줄이 없어져서 발권을 할 수 있으려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방송이 흘러나왔다.


    "1시 20분 구마모토(熊本)행 비행기를 예약하신 XXX, OOO손님, 지금 바로 28번 카운터로 오시기 바랍니다."


    공항에서 내 실명이 울려퍼질 것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는데, 발권을 빨리 해준다는 말에 그저 감지덕지 할 수 밖에 없었다. 카운터의 직원의 표정에서 '너 왜 늦게 다니니?'하는 살짝 짜증섞인 느낌을 받았지만 나는 그저 죄송해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발권은 해드리지만, 시간 안에 탑승 못하시면 출국 안되십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간담이 써늘해졌다. 한 달을 준비한 여행 계획이 우천으로 인한 교통 체증으로 마무리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캐리어를 부치고 표를 받아들고는 냅다 입국 수속을 밟으러 뛰어가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할 만한 것은 최근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인해 관광객이 크게 감소해서 출국 심사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면세품을 구입한 것이 없기 때문에 면세품 인도장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는 것. 두 가지 사실 덕분에 의외로 여유롭게 입국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아침부터 전전긍긍하던 쫄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스를 수 있었다. 공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시간이 되어 비행기를 탔다. 아침을 거르고 공항에서 점심을 가볍게 때울 생각이었는데, 그만큼의 여유는 없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비행기에 올라탄 점은 좀 아쉬웠다. 어쨌든 여섯번 째 일본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가 그친 인천공항>







    <오래 전부터 준비한 티켓>







    <탑승수속 직전>






    구마모토 공항의 국제선 청사는 참으로 아담했다. 주로 국내선으로 사람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주요 서비스가 국내선에 치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날아와 계속 주린 배를 움켜쥘 수 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머리속에서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네 파이어~ 싹 다 불태워라 바우와우와우~'


    과연 남쪽지방의 열기는 대단했다. 잠시나마 '남쪽은 더울때 가야 진짜 분위기를 알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안이함을 저주했다.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지글지글 올라오는 모습에 압도당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버스의 에어컨이 빵빵하기를, 그리고 그 버스가 빨리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교통센터앞(코쓰센타마에)까지 버스비는 730엔이었는데 천엔짜리 지폐를 내고 나니 270엔 동전이 주머니에 차르륵 쏟아진다. 100엔 두개, 50엔 하나, 10엔 두개 하면 겨우 동전 다섯개인데, 한국에서 들고 온 동전까지 하니 이미 주머니가 동전 천지였다. 일본 여행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먹고 1엔, 5엔짜리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점점 처치곤란이 될 것이다. 







    <아소-구마모토 공항 전경>







    <아소-구마모토공항 앞 버스정류장>






    다행히도 금방 도착한 버스를 타고 교통센터로 가는 길에는 구마모토 외각의 풍경이 펼쳐졌다. 높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은 완만한 구릉이 넓게 펼쳐진 지형은 마치 제주도의 그것을 보는 듯했다. 진한 초록색 숲 사이사이에 연녹색의 초원 같은 것들이 펼쳐져 골프장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정상 부근에는 거대할 것이라 짐작되는 풍력발전기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간신히 보였다. 워낙에 멀리 있었던 탓이다. 공항에서 교통센터로 가는 버스는 오후에 오른쪽으로 해가 들어오는 모양인데, 내가 마침 오른쪽에 앉아서 따끈따끈한 햇볕과 정면대결을 펼쳐야만 했다. 풍경도 왼쪽이 더 멋들어져 보였는데, 사람이 앉아있는 관계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해 아쉬움이 가득했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중간중간의 정류소에서 사람들의 짐을 내려주기 위해 내리시곤 하셨다. 더운 날씨에 왔다갔다 하기가 힘드셨는지 연신 땀을 닦느라 모자를 벗으셨는데, 머리카락이 모자에 눌려서 마치 레고와 같은 반듯한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 모습에 더위도 잊고 잠시 미소를 지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눌린 머리가 일본인의 직업정신에 닿아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운전 중 모자를 쓰는 규정을 만들고 그것을 철저히 지켜낸 것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본의 매력에 빠진 한 여행자의 색안경일 수도 있고.


    구마모토 교통센터는 중부 큐슈의 교통 거점으로, 큐슈 동서남북 어디로든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2015년 10월부터 공사에 들어가서 현재는 그 옆에 조그만 간이센터가 운영중인데, 정말 작은 간이건물인데다 앉아서 기다릴 자리도 스무개가 채 되지 않는 상태라 무더운 구마모토의 더위를 피하기에는 영 아쉬움이 많았다. 2일차부터 SunQ패스라는 큐슈 버스 패스를 사용할 예정이어서 교통센터에서 예약을 할 수 있는 것들은 미리 예약을 해두려고 했다. 센터에 들어가서 어리버리 하고 있자니 창구의 직원분이 이리 오시라고 손짓했다.


    "버스를 예약하고 싶은데요, 내일은 첫차로 구로카와 막차로 구마모토, 글피에 타카치호행 첫차, 노베오카행 막차 있나요?"


    라고 물으니 구로카와는 예약노선이 맞아서 지금 예약이 되는데 노베오카행 타카치호 경유 큐슈횡단버스는 예약노선이 아니라고 했다. 어쩐지 한국에서 예약을 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되지를 않더라니. 말 그대로 3일차에는 시간 맞춰 나와서 일찌감치 줄을 서는 것 밖에는 없는 듯 했다. 예약을 받지 않을 정도면 생각보다 승객이 많거나 하지는 않겠다는 해석을 하면서 예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구마모토 교통센터(코쓰센타)>





    시간은 겨우 오후 6시를 갓 넘겨 한국에서라면 밤거리 구경이라도 돌아다니겠지만, 우리보다 해가 일찍 뜨고 일찍 지는 일본은 많은 상점가들이 이때쯤 문을 닫는다. 우선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해는 벌써 뉘엇뉘엇 산 넘어로 넘어가고 있는데 습하고 뜨거운 공기는 여전했다. 지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를 건너며 겨우 10분 거리에 있는 숙소를 찾아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횡단보도 녹색 점멸등은 왜 그리 늦게 켜져서 나를 힘들게 하던지. 그래도 교통센터에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아놓은 것이 정말 신의 한수였다. 






    <구마모토 해바라기>






    토요코인은 일본의 유명한 비지니스 호텔 체인인데, 전국 곳곳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기본적인 서비스가 좋아서 현지에서 많이들 사용하는 것 같다. 나는 처음 묵어보았다. 프론트에 도착하니 직원분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일본어 듣고 말하기도 간신히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어가 좀 더 편하기 때문에 '영어로 가능하시냐'고 물어보았지만 '조금밖에 못합니다.'라고 하며 미안해하셨다. 관광 호텔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출장 등에 사용되는 비지니스 호텔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와닿았다.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설명을 듣고는 3층 방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의 방이라 조금 시끄럽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앞으로 3일간의 베이스캠프가 될 곳이었다. 이 곳이 편안한 만큼 여행도 편안해 질 터였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에어컨을 최대로 틀고 가방을 열어제꼈다. 아침에 맞은 비가 가방에 스며들어 곳곳에 습기가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건 몰라도 습기는 카메라와 상극이라 빨리 말려주는 편이 좋았다. 내가 춥더라도 카메라가 젖지 않는게 낫다. 나는 이불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며 습도가 떨어지길 기다려야 했지만.







    <숙소 내부>






    잠시 뒤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는 가볍게 카메라 하나를 옆으로 둘러메고 교통센터 건너편의 아케이드로 향했다. 가볍게 저녁이나 먹을 겸, 취미생활인 가챠나 찾아볼 겸 해서 나갔던 것인데, 생각보다 그 아케이드가 길었다. 여행 첫 날은 기분이 그렇다. 끝까지 가보지 못하면 왠지 나중에 궁금해질 것 같은 느낌에 끝까지 걸어보는 것이다. 여독이 쌓이거나 한 것도 아니라서 자신감있게 쓸데없는 곳에 체력을 낭비하는 셈이다. 그렇게 아케이드 끝까지 가서야 '아 별게 없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 터덜터덜 걸어 돌아왔다. 구마모토가 크지 않은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아케이드와 그 넓은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며 그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다. 






    <구마모토 교통센터 건너편 아케이드>






    에어컨바람을 강하게 쐬어서 그런지 따끈한 라면 국물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아케이드를 타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천하일품'이라고 적힌 라면집을 발견했다. 사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오면서 창 밖으로 스쳐지나갔던 이름이었다. 체인점인 듯 싶었는데, 왠지 반갑기도 하고 '천하일품'의 맛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들어갔다. 주인장의 추천이라는 '텟코리 라멘'을 시키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국물이 얼마 없이 걸쭉해서 거의 조림에 가까운 라면이 나왔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을 생각했는데 역시 이름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이 날을 대비해서 일본어 메뉴만 공부하는 책도 구해다 읽고 쓰고 했는데 다 소용 없었다. 언제쯤 되어야 음식점에서 괜찮은 메뉴를 찾아 주문할 수 있을까. 이건 일본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의 감각없음의 문제가 더 크다. 한국에서도 먹는 음식만 주워섬겼지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행의 큰 즐거움이 먹는 것이라는데, 나는 그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는 것 같아 때로는 아쉽다. 아무튼 그 걸쭉하고 상당히 짠 라면을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 호로록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그 라면가게에는 서비스로 삶은계란이 무한리필이라고 하는데, 살충제 계란으로 한국에선 계란 대란이 나있었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많이 먹고 가는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양심상 하나만 까먹고 말았다.






    <메뉴판 공부를 위해 준비한 책>







    <천하일품 텟코리 라면>






    숙소로 돌아가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나올 일이 없기에 간식이나 음료수 등을 편의점에서 미리 사두기로 했다. 이것도 여러번의 여행 경험에서 나온 하나의 노하우랄까. 다음날 아침에 정신이 들기 위해 마실 커피 하나, 밤중에 목마를 때 마실 음료 하나, 저녁에 잠들기 전에 한 잔 하기 위한 호로요이 하나, 술안주로 먹을 간식 하나, 그리고 날이 더우면 가리가리군 하드 하나씩을 사는 것이다. 숙소는 마침 조식을 제공한다고 되어있어서 아침용 도시락을 따로 구매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봉투 가득히 먹고 마실것을 들고 숙소로 들어갔다.


    목적지에 오후 늦게서야 도착하게 되니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 동안 오전 비행기를 타고 오전에 도착해서 오후에는 관광을 하곤 했는데, 이번 여행 첫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일정을 알차게 소화해서 오늘의 아쉬움을 덜기로 했다. 미리 준비해둔 여행계획표 PPT를 훑어보며 시간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지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그마저도 잠시, 피로가 몰려와 태블릿에 넣어간 드라마를 보며 빈들거렸다. 조승우와 배두나가 나오는 '비밀'이라는 드라마였는데, 추천자의 말대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잠을 자려 누웠다가 드라마에 몰입해서 잠자는 시간이 늦어지고 말 정도로. 내일은 조금은 피곤할 듯 싶다. 그리고 또 다른 낯선 곳에서의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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