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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큐슈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3일차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17. 10. 9. 19:54
3일차의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 시작부터 더위가 장난질이 심했다. 심지어 습도도 엄청났다. 에어컨을 키면 춥고, 끄면 덥고 꿉꿉한 것이 반복되어 완벽한 수면을 취하기는 어려웠다. 과연 남큐슈의 8월은 만만치가 않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를 스쳐갔다. 그렇다고 여행을 중단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큰 각오를 다지고 나서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아침만 해도 이렇게 맑았는데...>
토요코인의 아침식사에 어느새 매료되어버린 나는 기어코 아침식사를 하고야 말았다. 출발하기 전에 따끈한 물에 반신욕도 하고 갈 욕심으로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꾸벅꾸벅 졸았다. 버스시간은 정해져 있고, 아침식사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부지런을 떤 것이다. 따끈한 물에 녹은 듯 살짝 편안해진 다리를 이끌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한상차림을 만들어 자리에 와서 앉으니 식욕이 절로 돌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은은한 단맛이 나는 폭신한 계란말이, 틀에 넣어 뽑은 티가 나지만 후리카케를 뿌려 맛이 딱 적당한 오니기리, 마요네즈에 잘 버무린 마카로니와 간장에 조린듯한 토란과 면, 뜨끈한 미소시루. 사람들이 내 입맛이 만족하기 참 쉬운 타입이라 놀리곤 하지만, 덕분에 나는 항상 진수성찬을 먹는 것이 아닌가. 질적인 탐미보다 양탐이 더 많은 나에게 아주 적합한 뷔페식 식사였다.
<토요코인 만족스러운 아침식사>
식사를 게눈감추듯 하고 나와보니 생각보다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통센터에 도착했는데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주변을 돌아다니는 수 밖에 없었다. 교통센터 앞에는 넓다란 잔디밭 광장이 있었는데 이날은 아침부터 뚝딱뚝딱 무언가 계속 설치를 하고 있었다. 무대도 있고 의자도 놓고 하기에 콘서트 같은 것이 있는가보다 했다. 일본 가수라야 엑스재팬 정도나 간신히 아는 처지라 유명한 사람이 나왔다고 해도 못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어떤 사람이 와서 어떤 공연을 할지 궁금하긴 했다.
<교통센터 앞 공연>
사실 구마모토의 교통센터는 생각보다 꽤 복잡해서 잘 물어보지 않고는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지 알기가 퍽 어렵다. 그래도 자리만 잘 알아두면 시간은 철썩같이 맞춰 오기 때문에 마음은 편안했다. 2번 정류장에서 西7번 버스를 타라고 했는데, 커피 한 잔 홀짝이는 사이에 도착을 해서 남은 커피를 원샷으로 털어넣고 급하게 버스에 올랐다.
<2번정류장에서 구마모토항으로 갈 수 있다.>
어제의 일정이 구마모토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서 아소산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라면, 이번에는 구마모토의 서쪽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그쪽에 구마모토항구가 있어서 바다 건너 시마바라(島原)까지 배편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시마바라는 나가사키현에 소속되어 있는데, 위치상으로 보면 나가사키(長崎)시와 구마모토시 중간쯤에 있다. (시마바라에 간 김에 나가사키에 다녀올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 번 보았던 곳이고, 시간 소모가 많아서 참기로 했다.) 이 곳으로 가서 운젠(雲仙)의 지옥을 구경하고 시마바라성에 다녀오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버스는 내 예상보다 꽤 오랜시간을 달려서야 구마모토항 언저리에 간신히 도착했다. 첫 번째 배는 도착할 수 있는 버스가 없어서 포기하고 두 번째 배를 탈 수 있도록 시간을 계산해서 버스를 탄 것이었는데, 배가 출발하기 10분 전인데도 항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 배 출발 5분 전이 되어서야 녹색 지붕의 항구에 도착했는데, 도착과 동시에 갑자기 예상치 못한 굵은 빗방울이 마구 쏟아졌다. 비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터라 당황하기도 했는데, 일단은 배 시간이 급했는지라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창구에서 산큐패스를 보여드리니 바로 표를 건네주시며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고 했다. 당황한 탓에 계단이 보이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래도 제 시간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제시간에 도착해 받은 배표>
<바쁜 와중에 대합실에서 발견한 구마모토성 모형>
다리로 된 통로를 지나 배에 들어가는데, 창문이 없이 뻥 뚫린 공간이라 비가 들이쳤다. 심지어 바닷바람이 거세서 굵은 빗방울이 뺨따구를 후려치는데 너무나 억울했다. '비 온다는 소리 없었잖아 일본 기상청놈들아!! 하여간 어딜가도 기상청은 믿을게 못돼!'라고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반신이 쫄딱 젖은 채로 배에 도망치듯 탑승했다. 배에 올라 얼굴을 보니 반은 쫄딱 젖어 거뭇거뭇 했고 반은 여전히 뽀송뽀송해서 아수라백작이 된 기분이었다. 아수라는 비를 맞아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성격이 나빴나 싶다. (요즘은 아수라백작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갑작스레 쏟아붓던 빗줄기>
늦게 탑승한 것 치고는 배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 차와 사람을 한꺼번에 나르는 카페리였기 때문에 아직 주차가 되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올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여유있게 가장 풍경이 좋을 것 같은 자리를 찾았다. 그 동안 일본여행에서의 경험에 따르면 풍경이 좋은 곳은 추가요금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 이 배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 꾸며진 2층도 선착순 입장이었다. 여섯명쯤은 앉을법한 테이블에 자리의 창가쪽 좌석에 앉아서 주구장창 바다를 구경하기로 했다. 그 동안에도 비가 몰아쳐서 차창 밖은 연신 빗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구경을 하고 있자니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고 앉은 좌석이었는데, 내 옆은 텅 비고 다른 곳은 꽉꽉 들어차자 정신적인 압박감이 오기 시작했다. 왠지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고 뭐 그런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한 무리의 가족단위 승객이 내 옆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어와서 얼른 승낙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타이완에서 구경을 온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남큐슈를 여행하면서는 한국사람을 많이 만나보기 어려웠고 반면 중국인은 엄청나게 많이 볼 수 있었다. 북큐슈와 남큐슈 모두에 중국인이 많은 것이겠지만, 한국인이 없다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국,대만인들이 많게 느껴진 것은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 가족들의 사진도 찍어주고 하면서 덜 뻘쭘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배가 멈출 즈음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사람들이 모두 인사도 없이 사라져 있어서 좀 당황스럽긴 했다.
<오션애로우호의 쿠마몬 깃발>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배의 흔적>
<시마바라항에 도착할 즈음엔 날씨가 환히 개어있었다.>
<거대한 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시마바라의 운젠다케>
<시마바라항>
시마바라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비는 그쳐있었고, 다행이지 않게는 대단히 더워졌다. 길에서 한 두시간만 걸어다니면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다행히 대합실 내부는 에어컨이 시원한 곳이라 더위를 피신해 있을 수도 있었지만, 버스를 타기 위해 잠시 나가는 그 순간에도 수명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2번정거장에서 운젠지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니 한 쪽으로는 넓게 바다가 펼쳐지고 반대쪽으로는 거대한 산이 보였다. 그 산 옆구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조금씩 올라가니 안개가 자욱하게 번져가고 있었다. 생각했던것 보다 운젠이라는 곳은 꽤 넓어서,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가늠이 잘 안되었다. 특히 방송에서 '운젠 호텔 입구'라고 나오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는데 같이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상당히 전전긍긍하고 말았다. 다행히 구글지도에서 운젠지옥은 좀 더(한참 더) 가야되는 것으로 나와서 떨어지는 엉덩이를 가까스로 붙잡을 수 있었다.
운젠지옥에서 내렸을 때 관광객이 한명도 보이지 않는 풍경에 조금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저 내가 평일 아침에 일찌감치 도착한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별로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나보다 하고 지레짐작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남큐슈의 교통편이 워낙에 띄엄띄엄있는지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건너편으로 가서 돌아가는 버스의 시간표를 확인해 둔 것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일이었다. 시간 확인을 하고 부랴부랴 다시 길을 건너 운젠지옥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집에 돌아와서 핸드폰 사진을 보니 그때그때 찍어둔 버스 시간표가 한가득이었다.)
<운젠지옥 앞 만묘지(萬明寺)에 오르는 스님>
생각을 해 보았다. 과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아주 오래 전에, 멀쩡한 땅에서 악취가 코를 찌르는 뜨거운 증기가 여기저기서 솟구치고, 이따금씩 유황이 연소되어 파란 불빛이 날아다니듯 나타난다면 그것을 지옥이 아닌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이 곳을 지옥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계란이 썩는듯한 내음이 은근히 나기 시작하고, 안그래도 후텁지근한 날씨에 유황증기가 뒤섞인 안개가 뺨에 와서 들러붙었다. 산책로 주변에는 물이 흘러내리는데, 김을 내며 부글부글 끓고 있어 온도가 상당함이 느껴졌다. 바람이 이따금씩 불어와서 안개를 치워주지 않으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계속 될 것 같았다. 한참 재미나게 걷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나 홀로 휑뎅그렁하게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 나서 무심코 다른 관광객들의 발자취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유황때문에 누렇게 변해버린 바닥 타일>
<처음 도착했을 땐 안개와 유황증기가 가득해서 한치앞이 보이지 않았다>
운젠도 꽤 넓은 곳이었지만, 운젠지옥 자체도 꽤나 규모가 컸다. 예전에 하코네(箱根)의 오와쿠다니(大涌谷) 정도의 규모를 생각했던 것인데, 산책로 전체를 따져보면 범위가 훨씬 넓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만을 보고 지나가면 그다지 대단한 곳은 아니지만, 그 온천수가 흐르는 색과 향, 그리고 바위에 들러붙은 노란색 유황가루, 잠시 멈춰서서 계란과 라무네를 먹을 수 있는 휴게소, 찜질방에 온 듯한 늘어져 잠자는 고양이들, 연기와 안개가 얼핏 사라질 때 펼쳐지는 공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유황증기가 모락모락>
<곳곳에서 모락모락>
<독한 유황증기에 나무난간이 침식되고 있었다>
산책로를 오르다가 경치가 좋아보이는 샛길이 있어 잠시 빠졌는데 그 곳에 갑작스럽게 십자가가 나타났다. 일본의 기독교도는 전 인구의 1%로 우리나라와는 달리 십자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희박한 확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십자가를 마주한 나의 놀라움이 이해가 가실런지. 아무튼,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어 부랴부랴 검색을 해 보니 내용인 즉슨 다음과 같았다.
일본의 기독교는 1549년 가고시마에 상륙한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큐슈지방에서 시작된 덕분에 큐슈와 주코쿠 일부 지역에서 돌풍을 일으킨 기독교였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은 도쿠가와 막부까지 기독교는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하나님 아래 만민평등의 이념을 내세우는 기독교가 신도사상 하에 철저한 계급주의를 옹호하는 막부와 융합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탄압이 특히 심했던 곳이 바로 시마바라였다. 원래 기독교도였던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라는 이름의 영주가 노베오카(延岡)로 이동되면서 그 후임으로 등장한 것이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였다. 그는 농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한 것도 모자라 기독교도를 모질게 탄압했는데, 특히 운젠지옥에서 기독교도들을 고문, 살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아들인 마츠쿠라 카츠이에(松倉勝家)는 기독교도들에게 벗을 수 없는 도롱이(재래식 우비)를 입힌 후 불을 붙여 뛰어다니게 했을 정도로 가혹했다. 이러한 일들이 누적되자 결국 시마바라 일대의 기독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라는 16세 소년을 주축으로 한 전투가 발생하게 되었다. 아마쿠사 시로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시마바라 성에서 다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그러한 기독교 박해의 순교장으로 운젠지옥의 한 곳에 순교비가 건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침 작년에 다녀온 나가사키 성 필리포 교회의 26인 순교자비와 겹쳐져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운젠 순교비>
일본 여느 온천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온천계란은 그 따끈함이 맛의 생명이다. 운젠지옥 한가운데 있는 매점에서 계란을 사다가 먹고 있자니 더위도 잊은 채 따끈함에 젖어들었다. 일본 계란은 노른자가 큰 편이라서 고소한 맛은 좋지만 목막힘도 심하다. 그래서 보통 라무네가 같이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점심을 가볍게 계란으로 해결했다. 옷에 배어드는 유황내음을 맡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곳에서 매점을 운영하시는 아주머니의 폐 건강은 괜찮으실까. 저 위의 오두막에서 낮잠을 청하던 고양이의 폐건강은 괜찮은걸까.
<따끈한 온천계란은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고양이 건강하게 지내라>
<잠자는 고양이 영상>1시간에 한 번 있는 버스 시간은 여행을 조급하게도, 여유롭게도 만들어준다. 어떤때는 볼 만한 것들을 다 보고도 다음 버스까지 시간이 남아서 몸도 좀 쉬게 하고 이런저런 생각도 해보고 계획도 다시 점검해보고 하게 되지만, 어떤때는 당장 10분거리에 있는 정류장에 8분 뒤에 버스가 도착하게 되어서 미친듯이 뛰어다니게 하기도 한다. 대중교통이 주는 묘미이면서 스릴인 셈이다. 마침 운젠지옥에서도 버스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서 스팀이 올라오는 인도를 걸어보기도 하고, 버스정류장 뒤켠에 있는 작은 절을 거닐어보기도 하면서 여행지의 여유를 즐겨볼 수 있었다.
<펄펄 끓는 물이 솟아오르는 운젠지옥>
<공간이 제법 넓어 한바퀴 크게 돌려면 시간이 꽤나 소요된다.>
<만묘지 주변에 불상이 많이 있다.>
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도착한 버스를 타고 시마바라성을 향해 달렸다. 이로써 오사카성, 히메지성, 후쿠오카성(터), 가라쓰성, 고쿠라성, 슨푸성(공원), 카케가와성에 이어 8번째 성을 보게 되는 셈이다. (마지막날에는 구마모토 성을 보았으니 총 9개의 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일본 특유의 건축물을 구경하는데 이끌린 것이지만, 지금은 일본 전역의 성을 모두 구경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시마바라성은 시마바라역에서 가는 것이 좋다고 안내서에는 나와있지만, 모 블로그에서 본 정보에 의하면 그 한 정거장 전인 '오테'에서 가는 것이 더 가깝다고 했다. 실제로 내가 내려본 결과도 오테에서 더 가까웠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 블로그의 주인장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오테에 내려서 바로 만나게 되는 남국의 풍경>
<멀찌감치 보이는 시마바라성 천수각>
남큐슈에 와서 여러번 느낀 부분이지만, 대낮에는 거리에 사람들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대낮에 돌아다니다가 쓰러져서 그대로 저승행 열차를 탑승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아무리 최대한 그늘을 이용하여 돌아다닌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햇빛에 노출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그 뜨거움은 위에서 지글거림은 물론 아스팔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지글거림까지 더해져 마치 양면으로 구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뜨거움과 따가움이 공존하는 그 여름날의 태양을 뚫고 시마바라성에 가는 길은 운젠보다 더 지옥같았다. 성 건축의 목적상 입구는 한 방향에 있어서 그 문을 찾아 해자를 빙 둘러 돌아들어가야 했는데, 그 길이 왜 그리도 멀고도 험했는지... 마지막에 성으로 들어가는 야트막한 경사에서 마지막 힘을 다 쏟아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곳에는 내게 있어 오아시스처럼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매점이었다.
<해자에 연꽃과 개구리밥이 가득했다>
<더위를 뚫고 마지막 고비인 언덕을 넘으면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천수각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온 왼쪽의 매점>
내가 교토에서 처음 맛보고 사랑에 빠진 것은 일본식 빙수다. 카키코리 라고 하는 이 빙수를 파는 가게에는 반드시 얼음 빙(氷)자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어 나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본을 주로 여름께에 찾았던 나에게 카키코리는 생명수와도 같았다. 특히 블루하와이 시럽을 듬뿍 뿌린 빙수 한 입이면 방금전까지 지옥불을 나뒹굴었든 태양을 스쳐 지나왔든 금새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런 빙수가 그 매점에 있었다. 허겁지겁 겉과 속을 달래주니 비로서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명을 연장시켜준 딸기맛 빙수+연유>
시마바라성은 기단부 1층과 천수각 5층짜리로 구성이 되어있었는데, 그동안 보아왔던 성과 달리 약간은 뚠뚠한 모습이었다. 건물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고 하단부와 상단부의 너비차이가 커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피라미드를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무사복장을 한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해주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 많은 사람이 찾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도 자리에 서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 멋있었다. 사무라이 복장을 한 분은 투블럭 컷에 꽁지머리가 카리스마 넘쳤는데, 나중에 성을 구경하고 매점에 다시 들어와서 말하는 것을 보고서야 여자분인것을 알았다. 아무튼 여러가지 의미로 멋진 분이었다.
성을 여러번 찾다보니 그 구조에대해서도 지식이 쌓이게 되는데, 시마바라성은 연곽식 구조로 되어있다고 한다. 천수각을 시작으로 제1외곽성, 제2외곽성이 연달아 나타나는 구조다. 이전에 갔었던 오사카성 같은 경우는 천수각을 중심으로 제1외곽성(니노마루)와 제2외곽성(산노마루)가 바퀴처럼 둘러싼 윤곽식이라고 하고, 히메지성 같은 경우는 성곽이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나선식이라고 한다. 실제로 다녀왔던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았다. 이렇게 또 하나의 지식을 얻게 되는 셈이다.
시마바라성은 유신기의 폐성령에 의해 1871년 민간에 매각되어 해체되었다가 1960년대에 복원한 복원천수이다. 성은 앞서 운젠지옥에서 언급했던 마츠쿠라 시게마사에 의해 축성되었으며, 영지에 맞지 않는 큰 성을 축조하게 된 결과 농민 세금부담이 가중되어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 연 수입의 50%를 세금으로 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보면 연봉이 반으로 쪼그라드는 셈이다. 아무튼 시게마사는 운젠 서쪽의 오바마온천에서 돌연사하고 그의 아들인 카츠이에가 이어서 기독교 탄압을 하지만, 결국 농민 반란의 원인 제공을 이유로 참수당한다. 그리고 이 시마바라성은 당시 농민봉기군이 포위공격을 하는 등 시마바라의 난과 연관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1층(기단에서 1층 올라간)의 전시실에 당시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전시 안내를 해주는 분이 계셨는데, 전시품을 찬찬히 보고 있는 내게 다가오시더니 시마바라의 난에 대해 일장연설로 설명을 해주셨다. 다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열정적인 그 아주머니의 고향에 대한 애정어린 마음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에 가장 중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아마쿠사 시로를 나는 사실 '소년탐정 김전일'이라는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첫 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만한 것이, 그 만화책에서 아마쿠사 시로는 민중 봉기를 주도한 미소년으로 힘든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나도 그런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일본에서는 반란군이라는 이미지로 상당히 극악무도한 인물로 여겨지는 듯 했다. 특히나 '마계전생'이라는 일본 서브컬쳐에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에서 악역으로 등장한 영향이 크다고 한다. 아무튼 내게는 따뜻하고 온화한 이미지라 그런 사실이 조금 놀랍긴 했다. 당시 기독교는 에도막부의 직접적인 탄압 대상이라 대놓고 종교활동을 할 수 없었고, 관음상을 슬쩍 리모델링한 마리아관음이라던가, 은근슬쩍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십자가라던가 하는 식으로 활동을 근근히 유지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도 만화책에서 알게 된 것이니, 만화책의 위력을 쉽게 보지 말지어다.
<마리아관음>
그런 자료들을 구경하고 천수각 전망대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이고 좋았다. 한 쪽으로는 바다가 멀리 퍼져나가고, 다른 한 쪽으로는 운젠다케가 벽처럼 서있는 모습이 박력넘쳤다. 멋진 모습들을 눈에 가득가득 담고서도 한 동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바람을 쐬며 다시 보기를 거듭했다. 더위는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천수각에서 내려다 본 시마바라 풍경>
성에서 내려와 뒤편으로 가니 '서망기념관'이라는 곳이 있었다. 누군지는 몰랐지만 들어가서 전시물을 보고서 바로 감이 왔다. 먼저 찾았던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평화기념상을 조각한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의 작품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청동의 좌상은 평화공원에 다녀왔던 사람이라면 잊지 못할 조각상이기에, 놓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평화공원의 것은 9.7미터 짜리고 이 기념관에 있는 것은 그 미니어쳐(그래도 한 2~3미터는 되어보이지만)였다. 그 외에 서망이 조각한 다양한 조각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알아주는 조각가/서화가 였다고 하니 한번쯤 들러 그 세계를 맛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시마바라성 티켓에 뒤의 서망기념관과 민속박물관 티켓이 포함되어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서망할아버지,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와는 달리 따스한 동네 할아버지였다고 전해진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전시된 평화기념상 제작과정>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민속에는 우리와 통하는 것도 제법 많다.>
이제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되어 시마바라성을 나섰다. 들어올 때 정오 근처의 불타오르는 태양은 조금 기세가 누그러져 있었고, 그래도 여전히 뜨거운 그 햇빛을 피해 그늘을 이리저리 건너뛰며 버스를 타는 곳으로 돌아오니 시마바라항구쪽으로 가는 버스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보통은 타고 온 버스의 반대편에 돌아가는 버스의 정류장이 있게 마련인데, 이곳에는 그런 정류장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부근이 순환구조로 되어있어 정류장이 한 방향으로만 있었다.) 사람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길거리에서 아주아주 희박한 확률로 두 행인을 만나게 되어 버스를 어디서 타야하는지를 물어보았는데, 그들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고 '시마바라역'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시마바라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시마바라역에 도착하니 그곳에 다시 에어컨이 있는 대합실이 있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시마바라항구로 가는 버스를 물어보려고 관광안내소에 길을 여쭈니 대뜸 어디서 오신 분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마침 저쪽에 한국에서 오신 분이 또 계시니 이야기나 나눠보라며 직접 데려다 주셨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안내까지 받은 마당에 서먹서먹해할 수도 없어서 말을 걸어보았다. 젊고 준수한 남자분이셨는데, 혼자 여행을 와서 나가사키쪽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정보를 나누고 나니 서로 혼자 여행을 하는 처지가 반갑기는 했다. 마침 버스시간이 되어 아쉬운 헤어짐을 고하며 서로의 여행에 더 큰 즐거움이 함께 하길 빌었다.
<초록 옷을 입은 분이 한국분이셨다.>
버스를 타고 항구로 도착하니 배가 한참이나 뒤에 있었다. 배편이 두개이고 산큐패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오션애로우'인데 시간이 꽤나 듬성듬성 있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처지였다. 기념품 매점을 어슬렁거리다가 북해도 허니소프트아이스크림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더위도 식힐 겸, 다음 목표 여행지인 북해도의 향취를 미리 느껴도 볼 겸 해서 매장 안에 한참을 서있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먹을 수 없었다. 북해도 아이스크림은 북해도에 가서 직접 먹어야 할 모양이다. 그 옆의 가게에서 옛날에 '아이싱'이라는 이름의 얼음과자를 생각나게 하는 '레몬맛 아이싱'하나를 사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생각보다 훨씬 셔서 침샘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배시간이 되어 배를 타고 이번에는 자리에 앉지 않고 뒤 갑판에서 주구장창 바다를 감상하며 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이라 뒤편으로는 시마바라의 정경이 펼쳐졌는데, 구름이 가득한 사이로 운젠산의 정상이 흐릿하게 보이고, 그 사이사이로 햇빛이 갈라져 바다에 떨어졌다. 커다란 배는 의외로 빨라서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바람을 만들어냈고, 배의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케한 연기가 아릿하게 섞인 공기에 몸을 맡기고 나는 그 습하고 뜨거웠던 시마바라의 모습을 기억하기로 했다.
<빛내림이 좋은 날이었다.>
구마모토항구에 돌아와서 다시 한참 버스를 타고 구마모토 교통센터로 돌아오니 저녁7시가 되었다. 구마모토에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가챠(장난감뽑기)를 미리 해두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미리 알아봐둔 가챠가 많은 매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빌리지뱅가드라는 곳은 오만가지 잡화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매장이었다. 예전에 도쿄 오다이바에서 한 번 구경한 적이 있어서, 안에 들어가면 재미난 것이 많겠다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다리가 워낙에 아파서 목표한 가챠만 하고 나오기로 했다. 아쉽게도 가챠의 수가 많지 않아서 그닥 뽑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금새 돌아오게 된 점은 아쉬웠다. 빌리지뱅가드 주변에 모두 백화점 등 커다란 상점이 많은 곳이라 저녁거리도 마련해서 올까 했는데, 식품코너도 예상보다 일찍 문을 닫는 바람에 이날 저녁도 역시나 편의점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평소와는 달리 스낵메뉴의 오뎅을 추가해서 뜨끈한 국물과 함께 저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뎅에서 무는 장식용이라고나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아주 맛있어서, 이후로 오뎅에는 무를 꼭꼭 추가해서 구입하곤 했다. (고독한 미식가에서 배웠으니 고로에게 감사할 일이다.)
<오뎅맛이 끝내줘요. 도시락은 쏘쏘>
호텔에 돌아와 씻고 에어컨바람에 속옷바람으로 누워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드라마 한편을 보면서 내일의 계획을 정리했다. 내일은 또 얼마나 힘들고 재미난 하루가 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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