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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로시마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4일차
    여행과 함께하는 이야기 2024. 7. 11. 10:47


    본 여행기는 2018년 히로시마와 그 주변지역을 여행한 여행기입니다.

    일본에 다녀온 모든 여행기를 올렸는데 히로시마는 마무리를 짓지 못해 미적거리다가 최근에서야 간신히 마무리를 하게 되어 뒤늦게나마 올려봅니다.

    교통정보는 상당히 변한 것이 많아 정보성은 부족해졌지만 그 외에 볼만한 지역들의 유래나 소개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서 아직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계획형 인간인 나지만 4일 차의 일정은 미정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는 미정은 아니었고 현지에서 3일 정도를 보내며 긁어모은 정보로 4일 차의 일정을 결정하기로 미리 정해놓은 차였다. 무계획이란 계획이었던 셈이다. 히로시마에서의 짧은 4박 5일 일정 중 귀한 하루를 쓰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고민이 좀 있었지만 결국 처음부터 강력한 후보였던 토모노우라 지역에 가보기로 했다.

     

    토모노우라는 내가 가지고 있는 히로시마 패스권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변두리지역 중 한 곳이었다. 버스로 한번에는 닿을 수 없고 후쿠야마까지 간 뒤에 갈아타야 했다. 그전에 노면전차로 터미널까지 가야 하는 부분까지 포함하면 편도로만 2시간 정도가 걸리는 상당히 먼 여정이었다. 왕복 4시간 정도를 교통편에서 쓰면서까지 볼만한 곳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는데 그렇다고 가까운 곳에 보고 싶은 곳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라서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했다. 워낙 일찌감치 첫차를 노리고 출발해서였는지 오전 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특히나 바다 마을에선 오전의 분위기와 오후의 분위기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두 모습을 다 보고 싶었던 나에게는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면전차 정류장
    토모테츠 버스센터
    마을의 풍경
    방파제 너머의 풍경

     

     

     

    토모노우라 정류장에 처음 내렸을 때는 조금 막막한 기분이었다. 히로시마에 오기 전에 알아봤다곤 하지만 다른 여행지처럼 열심히 알아본 것은 아니었던데다 처음에 버스에서 내린 곳에는 높은 방파제로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인접한 곳에 버스센터라고 적힌 곳은 사실상 토산품 판매점에 가까워서 관광 관련하여 물어보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주변 지역에 대한 안내 팸플릿도 대부분 일본어로 적혀있는 경우가 많아서 아직은 일본어 까막눈에 무한수렴하는 나로서는 해석이 쉽지 않았다. 우선은 좀 걸어보기로 하고 방파제 쪽으로 건너갔는데 그 너머로 세토내해의 잔잔한 바다풍경이 갑자기 펼쳐졌다. 파도가 거의 없이 잔물결만 가득한 바다에 햇빛이 내려와 부서져 윤슬로 흩어지고 있었다. 가까운 섬에는 물길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고 도리이가 하나 세워져 있어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섬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배로 이동하는 것뿐인데 한참을 보고 있어도 배가 드나드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건물이 하나 있어 신사인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확인해 보니 섬에 얽힌 이야기 한 자락이 있었다. 

     

    옛날 일본 오미국(현재의 시가현)의 무사였던 후지와라 마사미치는 미야지마에서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이 섬 근처에서 가문의 보검을 실수로 떨어뜨렸다. 인근의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칼을 찾아달라고 하자 한 청년이 마을의 명예를 위해 물에 뛰어들었고 곧이어 칼을 들고 나타나 무사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상어에 물려 사망하게 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사미치는 이 섬에 11층 석탑을 세워 청년의 영혼을 기렸다. 

     

    이야기를 알고 보면 조금 더 아련한 느낌이 드는 섬이다. 이 작은 돌섬이 토모노우라의 이곳저곳에서 보이는데 그때마다 멋진 풍경에 한몫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벤텐지마

     

     

     

    조금 더 걸어가니 시커먼 배가 하나 지나갔다. 범선의 형태인데 돛은 펴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21세기 범선이 다니겠냐만서도 복고에 상당히 진심인 나라다 보니까 혹시나 싶었다. 역시나 엔진방식의 선박이었지만 범선 디자인을 한 까닭이 있을 터였다. 조사해 보니 결국 사카모토 료마라는 사람에 대한 내용까지 알게 되었다. 배경지식이 있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볍게 그의 일생, 그리고 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에도막부의 말기에 태어났다. 본래 포목상, 전당포, 주조업(주류제조) 등을 하던 집안이었는데 증조할아버지대에 도사번으로부터 사카모토라는 성씨를 쓰는 것을 허락받고 분가하여 하급무사의 자격을 얻었다. 사실상 돈으로 하급무사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료마는 이로 인해 상급무사는 물론 하급무사들에게도 상당히 무시를 많이 받았는데 이 때문에 무사의 길보다는 상업으로 눈이 뜨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도사번의 경비대 신분으로 에도에 파견되어 유학생활을 하던 료마는 미국의 페리제독이 증기선을 몰고 에도를 포위하는 모습을 보았고(흑선개항사건) 이후 서양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움직임에 동참하여 활동하다 탈번하여 낭인이 되었다. 이후 가쓰 가이슈의 휘하에서 증기선 항해술을 배우지만 그가 정권에서 실각하면서 료마는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로 망명한다. 사쓰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를 꼬셔서 에도막부를 배제한 밀무역을 위한 회사를 설립한 뒤 원수지간이던 사쓰마와 조슈를 설득하여 삿쵸동맹을 성사시키기에 이른다.(역사학자들은 최근 이 이야기를 부정하고 있다.) 삿쵸동맹이 막부를 타도하는데 크게 활약하여 결과적으로 메이지유신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카모토 료마를 근대화의 중심인물로 인식하고 있다. 교토에서 암살의 위험을 간신히 피하고 사쓰마의 온천에서 요양생활을 한 료마는(이때 아내와 함께 이동했기 때문에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을 한 사람이라는 타이틀까지 획득했다.) 도사번의 지원을 받아 일본 최초의 해운상사인 해원대를 창설한다. 이후 교토의 오미야라는 간장가게에서 암살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이로하마루호는 위에서 언급한 해원대에 소속된 배였다. 짐과 사람을 싣고 가던 중 기슈번의 배인 메이코마루호와 충돌하였는데 100톤대 배였던 이로하마루는 800톤급의 배인 메이코마루와 충돌하여 짐과 함께 가라앉고 만다. 기슈번은 당시 아직 힘이 있던 에도막부쪽 집단이었고 료마는 탈번낭인집단에 불과했다. 기슈번 측은 적은 금액으로 사건을 퉁치고 지나가려 했고 억울하면 봉행소(일본의 관청)에서 재판을 받자고 하였으나 이는 에도막부 측에 유리한 결과로 나올 것이 뻔했다. 료마는 증기선끼리의 충돌은 국제법에 의해 재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국 공사관을 데려와 주재를 부탁한다. 료마 측은 재판에 승소하고 손실금액보다 훨씬 큰 액수를 배상금으로 받게 된다. 이 사건은 일본 최초의 근대식 재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긴긴 역사와 지금 이곳 토모노우라와의 연관성은 바로 이 이로하마루 침몰사건과 관계가 있다. 이로하마루호가 메이코마루호와 충돌하여 침몰한 곳이 바로 이곳 토모노우라다. 이곳에서 운항중인 검은 배는 '헤이세이 이로하마루'라고 하여 당시와 같은 증기범선의  외관을 하고 운영 중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고 일본 역사인물 중에 항상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사카모토료마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알겠으나 침몰한 배를 복원하여 관광선으로 사용하는 것은 조금 신기했다. 미신 같은 것을 잘 믿을 것 같은 일본에서의 일이라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헤이세이 이로하마루호를 탑승하면 벤텐지마 뒤쪽의 센스이지마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호텔도 있고 토모노우라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으며 상당히 프라이빗해 보이는 해변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쪽 풍경에 대한 정보가 없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나중에 검색해 보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신선이 취하는 섬이라는 의미의 센스이지마(선취도). 당시 반나절 정도면 토모노우라의 볼 것은 끝난다고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하루종일도 부족할 수 있다. 저 외진 곳을 다시 찾을 날이 언제나 되어야 올지 모르겠다. 

     

     

     

    이로하마루호
    헤이세이 이로하마루호
    출항
    선수를 돌려 센스이지마로
    돗대가 멋지다

     

     

     

    선착장이 있는 곳을 지나쳐서 조금 꺾어들어가니 내가 원래 토모노우라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후쿠젠지로 가는 푯말이 보였다. 살짝 언덕배기 길을 따라 올라가니 대조루(다이초로) 가는 방향이라고 하여 따로 표기가 되어있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처음엔 전형적인 절의 풍경이지만 잠시 뒤에 시야가 확 트이는 누각이 나타난다. 이곳이 대조루다. 세토내해의 새파란 바다를 마당으로 하고 배경으로는 벤텐지마와 센스이지마를 병풍으로 삼고 있는 풍경이다.  바다방향으로 향하는 벽 위쪽에는 '일동제일형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후쿠젠지는 서기 950년 전후에 창건된 절로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후 1700년 전후에 돌담 위에 누각을 세웠고 이때는 아직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으나 경치가 좋아 영빈관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711년 조선통신사가 이 곳을 지나다가 후쿠젠지에서 묵게 되었고 종사관 이방언이 일본 제일의 경치라며 감탄하고 '일동제일형승'의 글귀를 남긴다. 이후 1748년에는 정사 홍계희가 배를 타기 위해 조류를 기다리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대조루"라고 이 장소를 언급하고 이후 아들 홍경해가 글로 남기면서 비로소 이름이 붙었다. 

     

    더운 날씨에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들어가 경치를 감상하고 있자니 조선 통신사들이 이 곳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놀러 온 나도 이렇게 힘든데 일하러 온 양반들이 얼마나 덥고 힘들었겠는가. 그러다가 경치도 좋고 바람도 솔솔 부는 이 장소에서 경험했던 것이 추억보정까지 되어 경치까지 더 좋았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물론 추억보정 하지 않아도 워낙에 좋은 경치긴 하다. 하지만 내겐 이 대조루의 풍경보다 더 좋았던 곳이 토모노우라에 있다.  이때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국가사적 대조루
    일동제일형승비
    후쿠젠지 앞마당 풍경
    벤텐지마가 파란 바다에 펼쳐지는 일동제일형승
    대조루 현판
    한일간 바둑 대회도 있었던 듯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듯한 종이인형
    이로하마루호가 지나가는 일동제일형승

     

     

     

    후쿠젠지에서 나와 상야등(조야토)가 있다는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정형의 납작한 돌들을 바닥에 깔아놓은 길 양옆으로 오래된 일본의 가옥들이 보였다. 건물들이 오래되어 보였지만 거리가 깔끔하고 화분 같은 것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있어 작은 마을을 한층 귀엽게 만들고 있었다. 일본의 거리가 깨끗하다는 것은 참 오래전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월드컵이나 각종 국제체육행사에서 일본 관람객들이 머문 자리를 청소하고 나가는 모습이 종종 매스컴을 타곤 한다. 일종의 양성되먹임 같은 느낌이기도 한데, 본래도 자기 집 앞을 정리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습관이 있었던 일본인들에게 청결함이라는 이미지가 부각되었고 이후 매스컴 등에서 다뤄지고 세계적으로 인식되면서 자체적으로 깨끗한 거리를 더욱 유지하고자 하는 인식이 생기기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깨끗한 일본 거리가 완성이 된 것은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일본처럼 깨끗한 거리를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불법주차를 없애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부터 강력하게 잡아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일이 지금까지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사실 일본의 청결은 민족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불법주정차나 쓰레기 무단투기에 대한 벌금이 상당히 세다는 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우리나라도 언젠가 이런 부분은 좀 배워서 도입해야 하지 않을까. 

     

     

     

    상야등 가는 길
    꽃 이름 아시는 분 제보 부탁드립니다
    입강보명주 본점 간판

     

     

     

    길을 뚫고 나오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 비릿한 내음도 같이 느껴졌다. 토모노우라의 선착장에는 고깃배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바다는 유난히 푸른 색을 띠고 있었는데 날씨가 맑기도 했고 지역 특유의 물색인 듯도 싶었다. 그 건너편에 돌로 단을 쌓고 위에는 탑 같은 것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상야등이다. 에도시대 항구는 돌로 계단을 만들어 배가 드나들었고 주변에 등대역할을 하는 상야등(밤에도 항상 켜져 있는 등)이 있었는데 현대까지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시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극 속의 항구를 생각해 보면 보통 나무로 데크가 놓여있는 나루터정도가 간신히 생각나고 그나마도 현대까지 남아있는 설비는 거의 없다. 항구는 대부분 현대식으로 정비되어 선착장은 커다란 바위와 콘크리트로 마감되고 테트라포트가 잔뜩 쌓여있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옛 모습을 떠올릴 만한 곳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이 토모노우라의 옛 항구 풍경이 꽤나 귀하게 여겨진다. 항구에 돌계단을 쌓아놓은 이유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곳이라 시간에 따라 배를 댈 수 있는 위치가 달라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상야등
    선물가게
    저 동그란 것은 무엇?
    양조장
    상야등

     

     

     

    토모노우라는 에도시대 교통의 요지로 항구로서 작동했기 때문에 바다사나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하나가 발전한 바 있다. 바로 술이다. 문제는 내가 술에 조예가 아주 없다시피 해서 여행을 하던 당시에는 관심도 없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술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에 얽힌 이야기나 역사는 좋아하는데 당시에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지나갔다. 내가 토모노우라의 술이 궁금해지게 된 이유는 여행 후에 열심히 찍은 사진을 구경하던 도중의 일이었다. 지붕 위에 작은 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에 동그랗게 생긴 무언가가 매달려있는 것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두었었다. 당시엔 전통장식인가 하고 말았는데 여행기를 쓰려고 하다 보니 저 물건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동그란 것의 정체는 '스기타마(삼나무알)'이다. 이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무려 야마토시대(서기 250년~71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야마토정권의 제사에 술을 빚어 바치던 오미와신사(대신신사)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로 인식되고 있다. 신을 모시는 본전이 있는 신사와 달리 오미와신사는 산 자체를 신으로 두고 있어 본전이 따로 없다. 이 산에는 삼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신의 나무로 여겨져 신성시되는데 신위가 깃든 이 삼나무를 잘라 주조의 처마에 매달았던 것이 스기타마의 기원이라고 한다. 삼나무가 술의 부패를 막는다고 하여 부적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일본 전통주를 만드는 곳에서라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저 장식물을 만날 수 있다. 아무튼 이 스기타마는 새로 술을 짜기 시작하면 매달아 놓는데 처음에는 초록색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빠져 갈변하게 된다.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셈인데 이로서 술이 적당히 익었다는 표시가 되어 근처 주당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고 한다. 

     

    스기타마가 매달려있던 주조도 유명한 곳이었는데 모르고 있어서 땅을 치고 후회했다. 에도시대 양조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으로 오타가문의 주택이다. 이곳에서 제조하는 술은 보명주(호메이슈)라고 하여 '목숨을 보호하는 술'이다. 예전 조선통신사가 가져온 귀한 약재들을 미림에 담궈 만든 향약주라고 하니 왜 명줄을 보호하는지 알 듯하다. (물론 너무 마시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겠지만...) 후에 페리제독이 일본을 개항하면서 건배주로 사용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중세와 근대사에 알차게 등장하는 셈이다. 가격도 세지 않다고 하니 조금이나마 맛을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래서 사전조사가 없는 여행엔 뒤끝이 남는다. (물론 사전조사 했다고 제대로 다 보고 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이만큼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 스기타마가 보이는 곳이 있다면 한번 들러보게 될 것 같다. 아 그리고 나라 동대사의 남쪽에 있는 오미와신사도 방문해보고 싶다. 

     

     

     

    스기타마, 술은 잘 익은 것 같다

     

     

     

    토모노우라에서는 사카모토료마의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이로하마루호 이외에도 상야등 바로 옆에 있는 이로하마루 전시관이 있는데 예전 이로하마루 증기선의 일부를 재현하고 사카모토 료마의 행적을 기록하는 등을 전시해둔 곳이라고 한다. 사실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 데다 일본어가 한참 부족한 내가 텍스트 위주의 전시관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냥 지나쳤다. 입장료가 없었다면 눈 딱 감고 들어갔을 것 같기도 한데 무려 200엔의 입장료가 있었다. 나무위키에서 검색한 사카모토 료마의 행적으로 전시관을 대신했다. 이로하마루호 재판 당시에 료마가 몸을 숨겼던 마스야세이에몬의 집도 근처에 있다. 한참 동안 도대체 어디에 은신을 한 것인가 의문이 있었는데 1989년의 조사에 이르러서야 천장에 숨은 공간이 있음이 확인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놓치기엔 아쉬운 장소일 수 있겠다. 

     

     

     

    상야등 근처의 이로하마루전시관
    료마의 은신처
    료마의 은신처

     

     

     

    먼 길을 달려왔지만 토모노우라에서 볼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사전 조사에서 이오지에서 본 토모노우라 풍경이 좋다는 아주 짤막한 단서를 얻었기 때문에 그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항구를 끼고 크게 돌아드니 바다에 접해있는 주택들이 있었다. 집 옆에는 주차장처럼 보이는 곳들이 있었는데 바다 쪽으로 경사가 져서 그대로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점이 독특했다. 아마 작은 배 등을 직접적으로 띄우거나 정박시키는 용도로 보였다. 교토의 이네후나야 지역에도 이런 식으로 주택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선착장이 있다고 하던데 상당히 독특한 풍경임에 틀림없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난생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했던 시기의 일이다. 전라남도의 순천만과 보성의 녹차밭이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떠난 여행이었다. 녹차밭 근처에서는 숙소를 잡기 어려웠기에 바닷가마을까지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율포해수욕장이었다. 8월도 막바지에 접어들던 시절이라 해수욕장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민박도 더 이상 영업을 안 해서 졸지에 노숙을 하게 생긴 차였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동네 슈퍼에 들어가니 마침 그곳이 통장님 댁이었던 듯하다. 방을 하나 내주시겠다고 하여 저렴하게 값을 치르고 컵라면을 하나 사들고 방에 들어갔다. 장롱이나 화장대 등이 있어 숙박용 방 같지는 않았고 사용하시던 방 한 칸을 내주신 것 같았다. 물을 끓여달라고 할 염치가 없어서 그냥 스프를 뿌려 부숴먹을까 하고 있던 차에 문 밖에서 총각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빼꼼 내미니 저녁식사나 같이 먹자고 하셨다. 혼자 여행을 온 조그만 청년이 신경이 쓰이셨던 것 같다. 평상에 놓인 식사자리에는 낮에는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셨는데 거칠고 검은 피부에 엄청나게 커다란 손을 갖고 계셨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낮에는 뱃일을 하고 이제 돌아오신 것이라 했다. 집 밖으로는 바로 배를 댈 수 있게 되어있어서 그 배를 타고 일을 다녀오신 듯했다. 식탁엔 산더미처럼 작은 갈치가 쌓여있었는데 오늘 막 잡아온 것들이라고 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는 수박도 얻어먹었다. 방값으로 드린 것에 비해 너무 잘 얻어먹어서 염치가 없을 정도였다. 토모노우라에서 갑자기 율포 해수욕장이 떠올랐던 것은 집과 바로 연결된 선착장이라는 것이 공통점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게 토모노우라는 이상하게도 따스한 사람들이 살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참고로 몇 해가 지나 율포해수욕장을 다시 찾았을 땐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번듯한 리조트가 들어서있었다. 처음에는 추억의 장소가 없어진 데다 터를 잡고 살던 어르신들이 어디론가 떠밀리듯 가버리셔야 했을까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넉넉하게 보상을 받고 나가셨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건 좀 괜찮군 싶기도 했다. 어디서든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다시 한번 빌어본다. 

     

    일본의 낮은 상당히 더운데다 작은 마을에는 나이가 많은 분들이 많아서 좀처럼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보기가 힘들다. 이오지라는 곳을 찾아야 했는데 핸드폰으로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었지만 올라가는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라도 만나야 물어볼 텐데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아서 마치 사하라사막을 혼자 걷고 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때 유모차에 어린아이를 태우고 천천히 걸어가시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잘 못하는 일본어로 이오지에 가고 싶다 입구가 어디입니까 하며 여쭤보니 온 길을 되돌아가면 입구가 나온다고 했다. 감사인사를 올리고 다시 백여 미터를 돌아가니 입구가 있었다. 힘들 때는 찾는 곳이 한 번에 나오는 법이 잘 없다. USB도 꼭 한번 안 꽂혀서 돌려서 꽂으니 여전히 안 꽂혀 원래대로 하면 그제야 꽂히는 그런 물건이지 않은가. 내게 길 찾기는 가끔 USB를 꽂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선착장이 딸린 주택들의 모습

     

     

     

    날씨가 워낙에 좋았던 일본의 6월은 따가로웠다. 따사롭지 않고 따가웠다는 말이다. 햇살이 작렬하는 바다 마을의 산 중턱까지 계단 없이 경사로를 계속 오르고 있자니 현기증이 났다. 이럴 때면 항상 내 머릿속을 잠식하는 대사가 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라는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한참을 헉헉대며 오르니 드디어 이오지가 보였다. 언덕길이 나만 힘들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절 바로 입구에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들이 주르륵 놓여있었다는 점이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 그늘에 잠시 앉아있자니 비로소 토모노우라 항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크게 가로막는 것 없이 탁 트인 토모노우라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걸어다니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세토내해의 평온한 풍경이 내 마음에도 스며들었다. 마침 절에 아무도 없어서 고요한 가운데 이따금씩 통통배가 통통거리며 항구를 드나드는 소리만 들려왔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바다 마을의 풍경이 교과서에 있다면 아마 이런 장면이었을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 마을에서 수개월간 머물면서 '벼랑 위의 포뇨' 애니메이션을 구상했다고 한다. 나는 잔잔한 바다밖에 보지 못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오랜 기간 머물면서 평온한 바다와 흉포한 바다를 모두 접했을 것이다. 변화무쌍한 바다와 그런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애니메이션 곳곳에 녹아들었다. 나는 이곳을 여행하는 당시에는 벼랑 위의 포뇨를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보았다. 그때도 미리 보고 갔더라면 토모노우라가 조금 달리 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이오지에서 내려다본 풍경 속에 빨갛고 뾰족한 지붕집은 포뇨의 집이라고 하던데 나중에 사진에서 보고서야 그 집이었구나 하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토모노우라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토모노우라를 매립하고 다리를 건설하는 계획안이 있었는데 마을주민들이 열심히 반대를 했고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도 힘을 좀 써주십사 하고 부탁을 하기에 이른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자연을 중시하고 오래된 것이 없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기에 소송에 힘을 실어주었고 덕분에 개발계획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벼랑위의 포뇨가 토모노우라에서 영감을 얻었고 이로 인해 상당한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요소다. 

     

     

     

     

    오른다, 또 오른다
    분명 오른 사람들이 다들 힘들어했을테니 놓았을 의자들
    이오지에서 본 토모노우라 풍경
    이오지 풍경
    큰 범종이 달려있다
    아기자기한 항구의 모습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이오지에서 보는 풍경이 멋지다고 할 때 진풍경은 그보다 더 올라가야 있는 태자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이미 이오지까지 올라오느라 기진맥진해 있던 나에게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15분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데 내 체력으로는 한 30분은 걸릴 것이고... 하지만 거기가 진짜 찐 풍경스팟이라고는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나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마법의 문장이 떠올랐다. '언제 여길 또 오겠어?' 내 다리는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졌지만 오르기로 결정한 것은 일종의 부관참시가 아닌가 싶다. 나는 이오지 뒤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선 무덤부터 지나가야 했고 그 뒤에도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산길을 올라야 했다. 대낮이라도 인적이 없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었다. 

     

     

     

    태자전 오르는 입구

     

     

     

    번호가 적혀있는 600여개의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눈앞에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검은색에 나풀거리는 것이 도포자락 같은데. 아이쿠 저승사자 옷자락이구나. 잽싸게 정신을 차려 이승으로 돌아오니 아주 하찮은 전각 하나가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태자전이었다. 일본에서는 불교를 들여온 인물로 쇼토쿠태자를 언급하고 이와 관련된 사당들이 곳곳에 존재하는데 이오지의 태자전도 그런 의미에서 세워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태자전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올라와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 앞에 전망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찐풍경이라는 사실에 크게 공감했다. 이오지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토모노우라의 풍경이 더욱 드라마틱했던 것이다. 센스이지마와 벤텐지마를 정면에 두고 옆으로는 배가 하얀 거품을 내며 지나가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숨이 턱에 달하고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었다. 올라오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이다. 가끔은 힘들어도 한 발짝 더 나가야 한다. 그 앞에 어떤 보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 하루 앓아 누우면 그만이다. 

     

     

     

    생각보다 작고 볼품 없었던 태자전
    하지만 토모노우라에서 가장 좋았던 풍경
    이로하마루호가 쉴새없이 오간다
    센스이지마로 턴해서 들어가는 이로하마루호
    멀리서 본 상야등
    한층 더 아기자기하게 느껴지는 마을풍경
    바다색이 미쳐있다
    출항하는 배마져 아름답다
    좋은 건 한번 더 눈에 담아본다

     

     

     

    오르는 수고에 비해 내려오는 것은 한결 편안한 일이었다. 인생사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물론 계단을 계속 내려가는 것은 무릎에 안좋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오르는 것보다 체력적으로는 덜 힘든 일이긴 하다. 한참을 올라갔던 것 같은데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벌써 절이 나오나 하고 내심 놀랐다. 그대로 쉬지 않고 곧바로 마을로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은 선녀같다
    동네 한바퀴
    멋지게 생긴 기와
    남선방 절

     

     

     

    토모노우라는 작은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큰 신사가 있었다. 바로 누나쿠마신사다. 일본신화에서 바다를 관장하는 신인 오와타쓰미노미코토(와타츠미)와 수사노오노미코토(스사노오)를 모시는 신사라고 한다. 본래 각각 신사가 있어 따로 모시던 신이지만 메이지시대에 하나로 합쳐지면서 현재의 누나쿠마신사가 되었다고 한다.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큰 규모의 신사인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1800년도 더 전이라고 하니 그 규모의 이유를 얼핏 알 것도 같다. 앞서 언급했듯 예전에는 상업으로 꽤 번성하기도 했었던 곳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붕을 청동으로 얹었는지 특유의 옥색빛깔이 나는데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임팩트가 있었다. 돌로 만든 거대한 도리이에서 시작해서 계단을 한참 올라야 본당에 도착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어 직접 마주하면 규모감이 상당하게 느껴졌다. 신사에는 전통무용인 '노'춤을 추는 무대가 있는데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바닷사람들이 항해 안전을 빌며 봉납한 역석이라는 돌은 시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신사에 사람이 한두 명 정도가 전부인 썰렁한 분위기였는데 동네에서 사람을 보기 힘들었던 점에 미루어 보면 납득이 갔다. 다만 날씨가 좀 선선한 시간대나 단체관광객이 오는 시기라면 사람이 북적거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신사를 돌아다니다가 입구 근처에서 심하게 녹슨 기관포(?!)을 보았는데 만지지 말라거나 하는 표시가 없어 문화재는 아닌 듯싶었다. 히로시마 주변이 미일전쟁 당시에 핵이 투하될 정도의 군사도시(?!)라서 이런 방어시설이 설치된 것인가 싶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은 가끔 나를 답답하게 한다. 뭐든 하나하나 다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 성격이 글을 쓸 때는 좋지만 돌아다닐 때는 답답증을 유발하기도 하니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다. 대포 옆에 쓰인 글씨를 당시에는 알아듣지 못했는데 글을 쓰는 시점인 지금은 일본어가 조금 늘어 읽힌다는 게 재미있다. "오미쿠지를 여기에 매달지 마세요."라니 얼마나 하찮은 대우를 받고 있는 물건인가 싶다. 

     

     

     

    누나쿠마신사
    여기도 계단이 한참이다
    모시는 신이 많다
    이게 말로만 듣던 뜬금포
    누나쿠마신사에서 내려다 본 모습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오니 버스가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다고 되어있었다. 버스시간이 남으면 조금 더 돌아볼 생각도 있었지만, 이번 버스를 놓치면 또 두어시간은 있어야 버스가 도착한다고 했다. 두어 시간이나 구경할 거리가 없어 보여서 곧바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다시 후쿠야마역으로 돌아갔을 때 바로 옆에 후쿠야마성이 있었다. 다행히 후쿠야마에서 히로시마로 가는 버스는 좀 더 자주 있었기에 성을 구경해도 시간 손해가 많지는 않아 보였다. 원래는 피곤에 지친 다리를 좀 쉬이고자 숙소로 곧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후쿠야마에 가는 동안 조금 쉰 다리가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며 악마의 유혹을 속삭였다. 분명 다시 걸으면 아파올 것을 알면서도 지금 좀 편안하다고 다시 돌아다닐 수 있다고 착각하며 성을 구경하기로 했다. 

     

    후쿠야마성은 1,600년대에 지어진 성이지만 미일전쟁으로 파괴되고 60년대에 천수각을 재건하였다. 해자가 없이 쌩 육지에 덜렁 솟아올라있는데 예전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돌로 벽을 세워 주변보다 한층 높아진 상태에서 다시 천수각을 지었으니 그 높이가 상당히 높게 느껴졌다. 성 내부는 시립박물관으로 활용중이라서 후쿠야마 일대의 문화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걸어서 오르내려야 하는 점은 좀 힘들었다. 이미 며칠 동안 더운 날씨에 많이도 걸었어서 다리가 후달리는 증상이 있었다. 천수각 앞까지 오르는 것도 꽤나 힘들었는데 천수각을 오르느냐 마느냐를 두고 나는 햄릿처럼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나 '여길 또 언제 오겠냐.'는 마음이 이겼다. 최상층에 올라가니 여느 천수와 같이 360도를 볼 수 있게 탁 트인 풍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낙이 온다고 고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지방도시들은 낮은 건물들이 대부분이라 천수각 정도를 오르면 대부분 눈 아래 있기 마련이다. 희한하게도 후쿠야마성에서는 높이가 상당한 고딕양식의 건물 하나가 당당하게 마주 서있었다. 색이 화려하지 않아 처음에는 교회인가 싶었는데 우뚝 솟은 두개의 첨탑 꼭대기에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홀리 지온파크 성 발렌타인 이라는 이름의 건물로 확인해 본 결과 유럽식 성당을 본뜬 웨딩홀이었다. 아마 버블시대에 지어지지 않았을까 싶은 소도시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화려함이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는데 검색해 보니 내부 공간도 유럽 성당의 장식품이나 구조를 그대로 본떠놓은 것으로 보였다. 생각해 보니 일본은 기독교 인구가 적기로 유명한 나라인데 지방 소도시에 이렇게 커다란 교회라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크리스마스도 성대하게 치르고 발렌타인데이도 꼬박꼬박 챙기는 나라이며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로망인 사람도 꽤 많은 나라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 니즈에 충실한 건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후쿠야마성
    성 주변 볼거리
    산책하기 좋은 풍경
    후쿠야마 성 천수각
    천수각 정상에서 본 풍경
    고딕 성당이라 생각했다

     

     

     

    성에서 웨딩홀의 반대쪽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서양건물과 길쭉한 일본식 건물도 눈에 들어왔는데 이 곳의 역사도 제법 재미있었다. 일본에서 해산물 사업을 크게 벌여 '가쓰오부시 왕'이라고 불렸다는 안베 와스케가 자신의 별장으로 일본식 건물과 서양식 건물을 동시에 지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시대는 쇼와 초기라고 하니 대략 1930년 언저리에 세워진 건물일 것이다. 그 이전 시대 같으면 성 바로 옆에 성을 구경할 목적으로 별장을 세우거나 하는 일이 허락되지는 않았으리라. 안에 정원이 볼만하다고 하는데 나는 히로시마로 돌아가서도 정원을 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정원을 추가하지는 않기로 하였다. 이제는 정말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후쿠주회관 풍경
    서양풍 별장건물
    후쿠주회관

     

     

     

    히로시마로 돌아오는 길에 내 다리는 다시 살아났다.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내 다리는 분명 강해질 법도 하건만 예전의 체력에서 점점 후퇴하기만 하는 듯 하다. 아무튼 잠시의 휴식으로 짧은 부활을 얻은 내 다리는 나를 슈케이엔이라는 정원으로 인도했다. 슈케이엔은 17세기 히로시마를 다스렸던 아사노가문의 별장 정원이다. 한자를 풀어보면 축경원이 되는데 이는 경치를 축소한 정원이라는 의미다. 중국 항저우의 서호 경치를 모티브로 만들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도심지역 한복판에 위치한 이 정원은 빽빽한 나무숲과 잔잔한 연못, 독특한 아치형 돌다리가 특징으로 지친 도시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 속 힐링을 즐기기에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다리와 시력을 회복하며 천천히 구경하다가 문득 이 정원에 유명한 포토스팟이 있다고 하여 설렁설렁 걸어가 보았는데 이게 웬일. 웨딩촬영이 한창이었다. 정원을 다시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왔는데도 계속된 촬영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결혼하는 것도 부러워 죽겠는데 포토스팟까지 차지하다니 나는 은근한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속으로 '두고 봐라 니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관광지를 찾았을 때 내가 거기서 웨딩촬영을 하고 있어 주마.'라는 희망 섞인 투정을 부려보았다.. 아차, 결혼할 여친부터 구해야 하는구나... 그래도 일본이라 사람 하나를 배치해 놓고 "촬영 중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연신 사과를 하는 모습에 마음이 풀렸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생각이 다시금 머리를 스쳤다. 일반적인 국민들은 일상 속에서 미친 듯이 사과를 하지만 정작 나라 입장에서는 우리나라에게는 사과하지 않는 일본, 미친 듯이 사과를 안 하려고 하는 사람이 넘쳐나지만 정작 힘이 약해 자꾸 사과를 하게 되는 우리나라. 나는 미안한 건 미안하다고 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사는 사회였으면 싶다.

     

     

     

     

    석등갓이 엄청나게 넓다
    얇은 나무를 켜켜히 쌓아 만든 전통 지붕
    슈케이엔 풍경
    정말 손길 하나하나 안닿은 곳이 없다
    좋은 날씨가 한몫 더해주는 풍경
    걷다가 첨벙할 것 같이 생긴 돌다리
    도심 속 초록의 향연
    슈케이엔 풍경
    다소 위압적인 슈케이엔의 대문

     

     

     

    정원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충분히 휴식을 취해볼 요량으로 샤워까지 마치고 침대에 냅다 누웠다. 에어컨까지 켜놓고 핸드폰으로 인터넷 세상을 유람하고 있자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오노미치에서 같이 돌아다녔던 커플이 나를 찾아왔다. 그냥 방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를 찾고 있었다고 하는데 어리둥절했다. 무슨일이냐 물으니 본인들이 오늘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날이라고 했다. 그래도 나름 같이 방을 썼어서 인사를 하고 가려나보다 했는데 저녁식사 제안을 했다. 일본여행을 벌써 여러 번 하고 있었지만 외국인이 저녁에 초대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친해지면 자리가 불편하지 않게 즐겁게 떠들어재낄 줄 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전에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거나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러 번의 일본여행을 하면서도 사람과 친해지는 일은 잘 없었는데 이번에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돌아다니게 된 것을 계기로 금세 친해진 셈이었다. 커플 말고 나중에 체크인 한 다른 외국인과도 친해졌는지 저녁에 초대하였기에 우리는 넷이서 숙소에서 가까운 오코노미야키 가게를 찾았다. 잘 볶아서 철판에 내려주고 간 히로시마 스타일의 오코노미야키를 먹으며(물론 히로시마는 자기네가 오리지널이니까 히로시마스타일이라는 건 맞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즐거운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영어공부에 대한 욕구가 화산처럼 터졌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이야기를 100% 전달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100% 다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 이리도 답답한 일일 줄이야. 그래도 합석한 친구들이 쉽게 쉽게 이야기해 줘서 너무나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영국인 친구가 자기 계산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데 소용없었다. 독일인 여자친구도 '이 친구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 여기선 꼭 내고 싶다고 하니까 받아줘.'라며 끝끝내 우리의 계산을 거절했다. 서양이야말로 더치페이가 똑 부러진 나라라고 그동안 고정관념처럼 생각해 왔는데 정말 의외의 순간이었다. 돈을 계산해 줘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려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고마웠다. 한국에 오면 꼭 연락 달라고 하며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건넸다. 두 친구도 영국이나 독일에 오면 꼭 연락 달라고 했다. 이들과는 지금까지도 인스타에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숙소에 들어가 열차시간이 되어 떠나야 한다는 그들을 잠시 붙잡고 부리나케 위층으로 올라가 내 집에서 가챠를 꺼내들었다. 오노미치에서 구입했던 헬로키티 가챠였는데 파란색과 핑크색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그 푸근한 느낌이 두 커플과 비슷해서 주는 거라고 했더니 매우 고마워했다. 같이 식사를 했던 친구에게도 일본 근현대 복색을 한 여자 캐릭터 가챠를 하나 건네주었다. 나와는 식사를 하기 전엔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었어서 의외의 선물에 놀라며 즐거워해주었다. 현관 앞까지 그들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외국에서 만난 친구와 짧지만 소중한 우정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따스해졌다. 내가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하루이틀 더 친해질 시간이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걸음 더. 이번 히로시마에서 내가 얻은 교훈이었다. 

     

    나도 히로시마에서의 마지막 밤이라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쇼핑이다. 히로시마에 오면서 이래저래 부탁받았던 잔심부름들을 처리하고 취미생활인 가챠도 좀 하고 할 요량으로 돈키호테가 있는 거리로 나섰다. 여행은 끝났는데 심부름을 위해 노면전차를 타는 기분을 아는가. 쾌락(?!)의 시간은 가고 이제 의무감의 시간만 남아있는 것이다. 내가 여행객인지 약장수인지 모를 정도의 약과 영양제들을 샀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또 1년 정도는 다시 일본에 오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나의 급성여행그리움증을 달래기 위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먹거리를 샀다. 한정판 호로요이 8캔 정도면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나는 1년 정도를 버틸 수 있다. 다 떨어질 때 쯤 다시 일본에 오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오후의 홍차도 두 페트를 샀다. 계산을 하고 면세까지 받아 한 덩어리로 만들고 보니 이건 숫제 짐덩이가 아니라 물덩이였다. 매년 드는 생각이지만 결국 다시 뇌리를 스치고 가는 그 문장.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짐을 이고 지고 가고 있나.' 그래도 고생해서 들고 가면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은 나다. 결국 이건 모두 내 욕심이자 업보이다. 낑낑거리며 짐을 짊어지고 숙소에 돌아갔다. 친구들이 모두 빠져나간 숙소가 휑했다. 다음에 언젠가 여행지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 빌었다. 내일은 귀국일이지만 촌음을 아껴 들러볼 곳이 있어 일찍 일어나야 했다. 적적해서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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